brunch

습관을 바꾸는 효과적인 방법

생각과 습관은 크게 상관이 없다

by 박기복

8시 55분 교실 입실 완료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수첩과 펜, 그리고 휴대폰을 챙긴다. 8시 55분에 교실에 들어오면 인정, 56분 이후부터는 지각이라고 아이들과 약속해 두었기 때문이다. 칼같이 시각을 확인하기 위해서 휴대폰은 꼭 필요하다. 매일 조금씩 다르긴 해도 어떤 날은 열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종이 울리는 사이에 미끄러지듯 교실에 들어온다. 아슬아슬하다.


3분만 일찍 와. 왜 이렇게 빠듯하게 다니니. 늘 반복되는 잔소리를 하면서 교무수첩을 펼치지만, 실은 나도 그런 학생이었다. 종소리와 함께 들어오는 수준은 아니었어도 고작 1분 정도의 여유를 남기고 교실에 도착했다. 아침잠이 많은 데다가 부모님의 철칙이 아침 식사는 꼭 해야 한다는 것이어서 준비가 늘 빠듯했던 탓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학교에 일찍 가는 게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 가면 밤 10시까지 있어야 하는 징글징글한 곳에 뭐 하러 등교 시간보다 일찍 가 있지? 그게 나의 기본 생각이었다. 학교에 있는 동안은 ‘구금’ 중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학교가 그렇지 않았다고 하기에도 좀 애매하긴 하다) 나는 학교에 있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이 모든 건 십수 년이 지난 후에 생각하다가 얻은 결론이고, 당시엔 생각도 뭣도 필요 없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이렇게 마감 시간에 딱 맞추어 움직이는 습관의 폐해는 지각의 위험에 자주 노출된다는 거였다. 변수는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가 사고처럼 존재를 드러냈고 그럴 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지각을 했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도 않았다. 어쩌다 만나는 사고 때문에 매일의 손해를 감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다가 고3 어느 날 마침 주번이라 그랬는지(너무 오래전이라 기억도 가물하다) 일찍 학교에 갔다가 그다음부터 수능 때까지 쭉 이른 등교를 했다.


교실의 문이 열려 있었던가,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갔던가. 아무도 없는 빈 교실의 전등을 직접 켰던가, 켜져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고요한 아침에 혼자 교실에 앉아있는 경험이 무척 특별했다는 거였다. 당시 50명이 넘는 인원이 함께 사용하던 커다란 교실에서 흔히 접하기 힘들었던 그 고요가, 아직 0교시 자습이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한참 남았다는 사실이 나를 편안하게 보듬어주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백날천날 시간 약속의 중요성에 대해 잔소리를 들어도 바꾸지 못했던 습관을 단숨에 바꿀 수 있었던 건, ‘아, 좋다’ 하는 충만한 느낌 때문이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굳이 30분 일찍 등교함으로써 구금처럼 느껴지던 그 열다섯 시간 사십 분 전체의 빛깔이 바뀌었다. 당시 3년째 강제로 해오던, 그리하여 적어도 내게는 유린되었던 단어인 ’자율’ 학습을 수능을 몇 달 앞두고서야 비로소 실현해 낸 셈이었다.


단 30분의 투자로 달라져버린 입시생의 하루라니. 효율로 따져봐도 이것은 혁명, 요즘말로 하면 개이득이었다. 마땅히 손익의 셈법이 달라져야 했다. 30분을 기꺼이 더 쓰는 것은 더 이상 손해가 아니었던 것이다. 명백한 이익 앞에서 나는 기쁘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가게 되었을 때 나는 30분씩 일찍 등교해 강의실에 앉아 명상을 하는 학생이 되었냐면, 절대 아니었다.


나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입시생이라는 특별한 조건에서 잠시 형성된 습관일 뿐이었다. 교사가 된 후에도 빠듯하게 출근을 했고, 가끔 차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를 일이 생겼다. 도로의 사정은 무한한 변수를 품고 있었지만 공교육의 일과표에는 한 치의 예외도 없었다. 조회에 늦을까, 1교시 수업을 못 들어갈까 몇 번의 맘고생을 한 후에야 30분씩 여유를 두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 습관이 자리 잡는 과정엔 여지없이, 이른 아침의 여유 속에서 ‘아, 좋다’를 느꼈던 내가 있다.


나는 요즘 학교에서 틈만 나면 맹물을 마시는데, 이것도 예전 같으면 없었던 일이다. 음료수를 좋아하는 나는 설렌 마음으로 마실 거리를 고르는 사람이다. 다양한 선택지의 음료(커피와 차만 해도 종류가 다양하다)를 마실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고 맹물을 마신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이 글의 문법에 따르면, 그건 내게 명백한 손해였다. 고작 맹물 따위를 마신다니 그건 기대에 부푼 나 자신을 배반하는 짓이었다.


그러다가 요즘 혈당에 대해 염려를 시작하면서 그간 달달한 음료로 나를 달래주었던 것이 나에게 손해였던가, 이득이었던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을망정 지금으로선 공복에 물 한잔, 식전에 물 한잔, 식후에 물 한잔, 목이 탈 때 물 한잔을 마셔주는 것이 나에게 더 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맹물을 따끈하게 마실 때야말로 개이득인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예의 그 충만감이 차오른다. ‘아, 좋다’


어느 영화 제목처럼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던’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지루한 과정이 바로 삶이 아닐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금’이 달라지듯 시시각각 손익계산서는 업데이트된다. 과거에는 손해라고 생각해서 피했던 일들을 지금은 못해 안달일 수도 있다. 업데이트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선택을 달리하는 일에는 유난한 성실이 필요하지만, 성실이 뿌리를 내려 습관이 되려면, 해보니까 정말 좋더라는, 자신을 뒤흔드는 충만감이 필요하다.(라고 이 연사 두 손 모아 외.칩.니다)


연재를 몇 주째 어기다가 마감 당일 글을 쓰고 있는 지금만 해도 그렇다. 나를 식탁 의자에 앉힌 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내 글을 기다리는 얼마간의(얼마일까) 독자를 생각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다. 잠시 잊고 지냈다가 며칠 전 오랜만에 다시 맛본, 기어이 발행 버튼을 누르고서야 맛볼 수 있는 ‘기쁨‘을 자린고비의 굴비 마냥 허공에 매달아 놓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해 가며 이리 애를 쓰고 있다. 그나저나 글이 끝나간다. ‘아 좋다’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20250615)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