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이 산 땅과 내 행복은 상관이 없다
학창 시절, 나는 대체로 숙제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지만 가끔 아닐 때도 있었다. 숙제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수업 직전에서야 알아차릴 때가. 곧 1~2분 후에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숙제 검사를 할 테고 잘못을 어떤 식으로든 추궁당하기 직전의 급박한 상황에서 나는 (재빨리 손을 놀려 숙제를 베끼는 게 아니라) 숙제를 안 한 친구가 또 있는지를 찾았다.
숙제를 안 한 친구들이 많으면 한결 마음이 놓였다. 동지를 찾아서 공동 대응을 할 것도 아니고, 다수라고 해서 잘못을 용서받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오히려 숙제를 안 한 사람이 너무 많으면 선생님의 화는 더 커졌고 한 대 맞을 걸 두 대 맞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음에도 혼나는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게 심리적 안정감을 선사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인간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일 거다. 고립은 생존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고 어떻게든 무리에 끼는 것은 득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랴부랴 서로 간 공통점을 찾아서 무리를 만들고 그 안에 소속되고 싶어 한다. “숙제 안 한 사람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말에 혼자 일어서는 상상을 해보자. 선생님의 훈계나 처벌보다 두려운 것은 고립감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가 제시한 그 유명한 욕구 위계 이론에 따르면 5단짜리 욕구 피라미드의 3층에 소속 욕구가 놓여 있다. 생물학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채워지고 나면 인간은 소속감과 애정을 바란단다. 언뜻 생각해 봐도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가족, 친구, 동료가 주는 위안이 없다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가기 얼마나 팍팍할까.
굳이 가족, 친구, 동료가 아니더라도 타인이란 나의 소속 욕구를 채워주는 고마운 존재다. 소속감이야말로 타인들 없이는 도저히 충족될 수 없는 감정이니까. 사람들이 다단계 마케팅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가 팀워크와 동료애를 강조하는 데서 소속감이 충족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유행에 따르는 것도, 굳이 나이키 신발을 사 신고, 아이폰을 쓰는 것도 소속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은 옳고 그름을 떠나 무척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다. 문제는, 나와 같은 편에 들어와 있지 않은 타인의 존재다. 같은 소속이 아닌 타인들 말이다.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나 '그들'로 불리는, 손쉽게 경멸과 시샘 또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저쪽 사람들은 아주 단순하게 규정되고 상대화되어 심하면 적이 되고 더 심하면 괴물이 된다.
나는 한때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종종 들어가 글을 읽었다. 내가 재미있게 본 프로그램에 대한 예리한 분석의 글을 읽는 건 즐거운 일이었지만 간혹 불편한 공기를 느꼈다. 사람들의 급(?)을 나누고 서열화하는 풍조 때문이었다. 방송에 출연한 일반인을 두고, 대기업에 다닌다고 했는데 계약직이라더라, OO대라고 하는데 서울 아니고 지방캠퍼스라더라 하며 자신이 그어둔 경계를 기준 삼아 거짓말쟁이 취급을 했다.
그렇게 촘촘하게 경계를 그어대며 채우고 싶은 건 누군가의 얄팍한 우월감이겠지만 덕분에 그 공간에 흐르는 건 혐오와 경멸, 혹은 시샘이었다. 결국 매번 찝찝한 뒷맛을 느끼며 퇴장하곤 했다. 애써 생각해 낸 것은 커뮤니티에 직접 글을 써서 올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나, 소수가 주도하는 분위기겠거니 하는 희망 회로였다.
근데 얼마 전 <SNL코리아>의 ‘퇴사자 클라스:서열 전쟁’이라는 코너를 접하고 말았다. 전개는 이런 식이다.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모임 장소에 나간 주인공은 저가 브랜드 커피를 들고 온 타인들을 보며 우월감을 느낀다. 코미디답게 서사는 블루보틀 앞에서 열등감이 폭발하며 무너지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회차를 거듭하며 온갖 것이 예외 없이 서열화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건, 나와 비슷하게 고만고만한 서열이던 사촌이 나를 앞질러 나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다. 근데 참 이상한 일이다. 땅을 좀 산다 한들 사촌이 갑자기 재벌이 되는 것도 아닐 텐데 남도 아닌 사촌을 굳이 내 편에서 밀어내 시샘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문제의 본질은 내가 토지 소유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아주 촘촘한 금을 그어 놓은 데에 있을 것이다.
촘촘하게 금을 그어 분별할수록 불행도는 높아진다. 자가를 소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서울에 집이 있는 사람, 서울 중에서도 상급지에 집이 있는 사람. 이렇게 쉼 없이 금을 그어대다 보면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재벌 대 비재벌 정도의 구도로만 비교하고 살면 수많은 사람이 단숨에 행복해질 텐데. 아, 나는 이재용 회장에 비하면 무척 가난하다. 근데 내 주변 사람들 전부 다 그래.
눈치챘겠지만, 필승법은 이거다. 누구나 자신이 소속될 집단을 스스로 고를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들어간 원의 반지름을 최대한 길게 늘여 볼 일이다. 재산, 외모, 나이, 직업 같은 것으로 사방팔방 촘촘하게 경계를 그어대지 말 일이다. 생로병사의 질서를 거스를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애처로운 존재, 먹고 사느라 고군분투하는 지구인으로서 사실 우리 모두는 같은 처지가 아닌가. 최대한 큰 원 안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집어넣을수록 나는 안온해진다.
'재벌이 아닌 사람들(이른바 비재벌)'이라는 집단 안에서 나는 고작 수십억의 재산 차이 따위에 의기소침해지지 않는다. 그래봐야 피차일반 재벌은 아니잖수? 브런치에서도 그렇다. 얼마나 글을 자주 쓰든, 기막히게 잘 쓰든, 구독자가 몇 만이든 간에, 글쓰기에 진심인 마음만큼은 매일반 다들 챔피언이잖수? 눈금을 지울수록 '우리'는 커지고 '저들'은 줄어든다. 적과 괴물은 마침내 사라진다.
어렵더라도 자꾸자꾸 노력할 일이다. 큰 원, 아주 큰 원을 떠올리면서! ‘오직 한 번뿐인 삶을 잘 살아내고 싶은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원 안에,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귀한 사람들 모임’ 안에 내가 있다. 거기에 내가 시샘하던 나의 사촌도, 깜빡이도 켜지 않고 내 앞으로 불쑥 끼어들어 나를 화나게 하는 이웃 운전자도 넣어 보고, 말썽을 부리는 우리 학교 꾸러기들도 포함시켜 본다. 원 안에 들어있는 건 다 내 편이라고 여기는 나는, 그 커다란 동그라미 속에서 진정 평화롭다. (2025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