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은 죄가 없다
퇴근 시간 3분 전이면 사이렌이 울린다. 진짜로 울리는 건 아니고 내 마음속에서만. 하던 일을 급히 접고 노트북 전원을 끈다. 책상 위를 정리하고 종일 서랍 안에 박혀 있던 가방을 챙겨 교무실을 나선다. 내일 뵙겠습니다 라는 인사와 함께 후다닥. 비로소 차에 탑승하면 오늘도 미션 완수다. 소중한 나의 '칼'퇴근. 훗
몇 분 더 늦게 나온다고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애타게 나를 기다리는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사소한 만족감을 위해 칼퇴근에 작은 집착을 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집착은 그림자를 낳는지라 부득이 퇴근이 늦어지는 상황이 오면 나의 평화는 살짝 깨진다. 다 떠난 교무실에 혼자 있는 것은 어쩐지 서글프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주 무려 나흘이나 2~3시간씩 늦은 퇴근을 했다. 수행평가 성적 마감을 앞두고 채점을 몰아서 해야 했던 데다가 요새가 딱 나의 업무 시즌이기도 해서다. 엑셀 파일을 몇 시간씩 들여다보고 교과서를 170권을 검사했더니 집에 와서 내내 눈을 감고 있어도 눈의 피로가 풀리지를 않는다.
그러니 내 기분이 얼마나 별로였겠나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 소중한 칼퇴근을 하지 못했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얘기를 시작하려는 참인데, 아주 사소한 행동 덕분이었다. 지난 월요일 아침 출근을 앞두고 나는 책상 위에 펼쳐둔 주간 다이어리에 '야근 주간'이라는 네 글자를 적어 넣었다.
이번 주에 할 일이 넘쳐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마감이 정해진 내 몫의 일이 있었다. 누구와 나눌 수도, 안 하고 건너뛸 수도 없는 거였다. 다만 나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집에 끌고 와서 할 수도 있었고 아침에 일찍 가서 할 수도, 주말에 시간을 내서 할 수도 있었는데 나는 학교에 남아서 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야근 주간'이라고 적음으로써 기꺼이 야근을 선택하고 계획한 셈이다. 마감은 고정된 조건이지만 일하는 방식에서는 내게 '자율성'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효과는 컸다. 나는 상황에 떠밀린 사람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일정을 계획하고 조율한 사람이 되었다. 시선이 단숨에 바뀌었다.
남아서 일한다는 사실에 어째서 서글픔씩이나 느꼈을까. 마치 누가 억지로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도 나에게 '오늘', '몇 시까지' 남아서 일하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주라'는 성경 속 구절도 결국 '자율성'에 관한 이야기일 터다. 억지로 하는 사람이 되느냐 기꺼이 하는 사람이 하느냐를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되돌아 보면 (인지하진 못했지만) 실은 매 순간 결정해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분류했던 일들도 실은 선택의 결과였다. 주변 눈치를 봐가며 사는 건 갈등 상황에 놓이는 괴로움보다는 상대에게 맞추는 수고가 더 견딜만하기 때문이다. 명절마다 시댁에 가서 결코 쉽지만은 않은 며느리 노릇을 하는 이유는 남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내 삶에서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재작년에 <박기복의 널뛰기>라는 제목으로 연재글을 썼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 겪은 슬럼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글에서 나는 상황에 떠밀려 교직에 흘러와서 괴롭게 살고 있다는 고백을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매번 선택권이 있었고 모든 건 (신중하지는 못했을망정) 직접 선택한 결과였다고 인정한다.
나는 인정과 안정을 선택했다. 슬럼프와 번아웃 와중에도 직업을 때려치우지 못한 게 아니라 현실적인 저울질 끝에 버티는 쪽을 선택했다. 세상엔 최고나 최선의 선택 말고도 차선, 차악의 선택도 있는 법이니까. 내 기질과 선호를 따라 차곡차곡 선택을 해온 결과가 지금의 나다.
좋은 선택만 하는 기막힌 꿀팁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내가 한 선택이 좋은 것이 되게끔 노력하라는 것. 야근을 선택한 나는 눈이 빠지게 애쓴 덕에 일을 다 끝냈다. 교직의 형편은 점점 나빠지고 있지만 요즘의 나는 2년 전보다는 내 일에 만족한다. 내가 선택했으니 잘 책임져보겠다는 새로운 마음을 먹기로 ‘선택’한 덕분이다. (2025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