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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Feb 04. 2021

내 몸을 나누어 쓰는 이가 생기다

엄마는 처음이라서

회사 법인카드를 분실한다. 반납하지 않은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 동료들을 난처하게 만든다. (회사에서 새 카드를 발급해 사용할 무렵에야 겉옷 주머니에서 옛 카드를 발견했다.) 이미 갖고 있는 책을 주문한다. (책꽂이에서 같은 책을 발견하곤 벌써 택배가 왔구나 하고 놀랐다.) 친구 농담 한마디에 눈물을 쏟고(‘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어!’ 같은 대사를 내뱉었다.) 엄마가 차려 준 저녁상을 앞에 두고 반찬 투정을 부린다.(엄마는 내가 식탁에서 그런 행동을 한 건 태어나 처음이라고 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뒤 나는 몇 주간을 이렇게 살았다. 내 정신은 배 속에 들은 작은 점에게 온통 쏠려 있었다. 감정은 어찌나 풍부해졌는지. 눈물, 웃음, 짜증, 노여움 등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후우’ 하고 숨을 내쉬는 걸로 나는 마음 표현을 애써 감추었다. 

미열이 지속되어 얼굴은 벌개졌고, 평소라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온갖 냄새가 코로 흘러들었다. 배는 콕콕 쑤시고 온몸은 한없이 처져 눕고만 싶었다. 한데 이런 몸과 감정의 변화보다도 더 어려웠던 건 내 마음의 상태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신 테스트기를 구입할 때만 해도 꽤나 들떠 있었다. 영화나 책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을 내가 재현한다는 사실에 웃음이 났다. 남편과 깔깔거리고 넘길 해프닝 정도로 여겼으니까. 정작 결과가 두 줄이 나오자 미소가 지워졌다.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지?’ ‘내가 엄마가 된다고?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더럭 겁이 났다. 


임신 테스트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이야? 우리한테 아이가 생겼다고? 근데 어떻게 알고 검사를 했어? 몸이 이상했어?”

수화기 너머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음성이 점점 커지자 나는 누가 듣지는 않을까 주변을 살폈다. 아기를 가진 게 떳떳하지 못한 일은 아니지만 드러내놓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생리통처럼 싸하게 아픈 아랫배에 손을 대 보았다. 내 몸이 아닌 다른 생명체가 여기 또 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남편과 달리 나는 점점 기분이 처졌다. 결혼을 해서 한 남자의 아내라는 게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데 이제 아이 엄마까지 된다니. 가뿐하던 그때가 먼 옛일처럼 느껴졌다. 


문득 결혼식 날이 떠올랐다. 식을 마치고 우리는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이십여 일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려니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았다. 나는 목록을 적어 그에게 내밀었다. 양손 무겁게 짐을 들고 온 남편은 짐 꾸러미에서 까만 비닐봉지를 꺼내더니 자신의 캐리어 깊은 곳에 담았다. 마침 그 광경을 본 내가 물었다. “그게 뭐야?” 남편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준비는 해 놔야지. 가서 살 데가 없으면 어떡해.” 여전히 맹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게 그는 콘돔 박스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거다, 이거.” 나는 픽 하고 웃었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이제 결혼도 했는데 그게 꼭 필요할까? 어차피 우리 둘 다 나이도 있고 아이 미룰 것도 아니잖아.” 남편은 까만 비닐봉지를 짐에서 뺐다. 그러고 우리에겐 허니문베이비가 생겼다.     


도저히 업무에 집중할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회사 테라스를 서성이며 마음을 달래려 했다. 이번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잘했다. 신혼여행 가서 애기나 만들어 오면 좋겠다 하고 은근히 바랐는데.”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다, 나이도 있는데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 엄마의 말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 말들은 차곡차곡 쌓여 내 기분을 더 가라앉게 만들었다.

“신혼여행이 너희들이 부부로 살면서 가장 좋은 시간을 보내는 때가 아니겠냐. 게다가 둘 다 한국에 있으면 일하느라 바쁜데 거기선 몸과 마음이 다 여유로우니까 아기가 생기기 딱 좋은 환경이지.”

엄마랑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니, 매우 거북했다.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엄마도 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가야 놀란다. 살살 말해.” 

엄마가 하는 ‘아가야’ 소리는 참 감미로웠다. 그렇게 애틋하고 다정할 수 없었다. 나와 내 동생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우리 엄마가 사랑을 듬뿍 쏟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가는 무슨. 아직 태아도 아니고 배아라던데.”

심술궂게 내뱉었다. 그러자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가야 들으면 서운하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아가야도 벌써 다 알아.”

그 말에 가슴이 찌르르 저렸다. 혹시나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을 아가가 알고 있다면, 혹시 자신의 존재가 싫어서 그런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나는 배를 어루만지며 다급히 속삭였다.

“그런 게 아니야. 정말이야. 나는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애지중지 키울 거야. 우리에게 와 주어 고마워.” 

이 감정과는 별개로 난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하나 그걸 깊이 파다 보면 괜히 나와 몸을 함께 쓰는 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 봐 좋게 덮기 바빴다. 그러면서 좋은 핑계거리 하나를 찾아냈다. 이건 다 호르몬 때문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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