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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Feb 06. 2021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

엄마는 처음이라서

임신 진단기에서 선명한 두 줄을 확인하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회원 수가 제일 많은 인터넷 맘 까페에 가입해 질문을 올려 보았다. 순식간에 꽤 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축하 인사와 함께 지금 병원에 가도 피 검사만 할 거라며 조금만 참았다가 가라고 했다. 누군지도 모르고 어떤 상황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올린 글임에도 새 생명이 찾아온 걸 축복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기꺼웠다. 6살짜리 아들이 있는 직장 선배 역시 지금은 가도 별 소용없으니 2,3주 후에 가란다. 다수가 갈 필요 없다고 했으나 나는 점심시간에 기어이 사무실을 나섰다. 당장 산부인과에 찾아가고 싶었다. 거길 가면 보다 확실해질 거였다. 어떤 결과를 들으면 좋겠는지 사실 그때까지도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산부인과에는 평일 낮인데도 환자가 꽤 많았다. 남편과 동행한 아내,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아직 얼굴이 푸석푸석한 엄마, 앉아 있는 모습도 힘겨워 보이는 만삭 산모 등. 그 가운데 처음 방문해 어리숙해 보이는 내가 끼어 있었다.  


체중과 혈압을 잰 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진료실로 안내받았다. 간호사는 질 초음파를 해야 하니 속옷을 전부 벗으라고 했다. 하반신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펑퍼짐한 치마를 걸치는데 괜히 서러웠다. 준비가 모두 끝나자 의사가 입장했다. 초음파 장비가 몸속에 들어오자 생경한 느낌에 움찔했다.

“태낭이 보이네요. 크기로 봐서 4주 정도 됐습니다. 그런데 자궁 주위에 피가 많이 고여 있어요. 자궁으로 흡수가 되면 괜찮은데 출혈로 이어지거나 하면 잘못될 수 있습니다. 안정을 취하시면 좋겠습니다.”

모니터로 보이는 작은 점이 사라질 수도 있다니. 갑자기 초조해졌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놓쳐 버릴 수는 없다. 나는 다급하게 의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제가 뭘 잘못해서 피가 고여 있는 걸까요? 저는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의사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환자분이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이런 경우는 종종 있는 일입니다. 대개 임신 사실조차 모르고 생리로 생각하고 넘어가기도 하지요. 무리하지 마시고 자주 휴식을 취하세요. 그렇다고 계속 누워서만 지낼 필요는 없습니다. 잘 먹고 푹 주무시면 됩니다. 혹시나 하혈을 하게 되면 바로 내원하시고요.”

자로 잰 듯한 말투와 선을 긋는 것 같은 답변에 힘이 빠졌다. 결국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소리가 아닌가, 임신 사실을 안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확연히 다른 이유로 시무룩해졌다.


이날 병원에서는 임신 확인서도 발급해 주지 않았다. 첫 심장 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산모 수첩과 준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갔던 길을 회사로 돌아올 때는 터덜터덜 걸어서 왔다. 오는 길에 먹을거리를 사서 배를 채우려 했는데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때마침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불안한 내 마음을 헤아려 주기는커녕 더 겁을 먹게 만든 의사를 향해 원망을 퍼부었다. 남편은 내가 우는 걸 처음 보았기에 더욱 쩔쩔 맸다.   

이후에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을 보다가 산부인과 의사 석형이 산모에게 하는 말에 나는 또 눈물이 났다.

“유산이 왜 병이에요? 유산은 질병이 아니에요. 당연히 산모님도 잘못한 거 없고요.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나, 앞으로 내가 뭘 조심해야 하나 물어들 보시는데 그런 거 없어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그때 그 의사도 이런 마음이었을 거다. 뭔가 잘못했으니 이런 일이 생겼겠지, 죄책감에 빠지려는 환자를 냉정한 말로 정신 차리게 했다.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의사를 오해한 내가 새삼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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