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처음이라서
마우스로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이 사람에게 이런 메일을 보내도 되는 걸까? 하나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받는 사람은 지난달 내가 만드는 잡지에 원고를 청탁한 기자. 메일을 쓴 목적은 그녀의 글이 실린 잡지가 발간돼 보내 줘야 하는데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지 못해서였다. 주소와 전화번호만 묻고 말걸. 나는 보낸 메일함을 열어 방금 쓴 메일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시작은 정중했고, 내 의도도 명백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내용이 꼬이기 시작했다. 내게 예상치 못한 허니문베이비가 생겼다는 고백이 시작되더니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혹시 아기가 들을까 봐 혼잣말조차 하지 못했다.) 내 마음을 쏟아놓았다.
“처음 알자마자 너무 무섭고 슬퍼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
내가 이렇게 속내를 보일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우리 잡지에 기고한 글 덕분이었다. 결혼식 직전 받은 그녀의 글이 인쇄될 무렵 나는 임신 5주 차 진단을 받았다. 기혼녀도 어색한데 엄마라니. 나 김혜원에서, 누군가의 아내가 이제 아이의 엄마가 된 것이다. 신분의 변화를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잡지를 열어 그녀의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잡지를 만들며 수차례 읽은 글인데 새삼스러웠다.
30대 후반에 엄마가 된 그녀는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평생 사랑할 대상을 만나는 일’이라는 영국의 하숙집 할머니가 한 말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아이는 온종일 함께 있어도 그저 좋다고 하고, 보고 있으면서도 또 보고 싶다고 안아 달라고 매달리고,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것은 엄마라고 확신에 차 웃는다. 세상 어떤 존재가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찾고, 나로 인해 행복해할까. 육아의 본질은 사랑을 만끽하는 일인 듯싶다.’
그렇게 사랑할 대상이 생기는 건 기뻤지만 누군가 나만 오롯이 바라본다는 생각에 미치자 슬그머니 겁이 났다.
“저만 바라보며 웃는 아이에게 저는 그 아이의 사랑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엄마가 되어 줄 수 있을까요?”
나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편으로는 그 글에 큰 공감을 얻은지라 “선생님의 글이 많은 이에게 도움과 격려가 되니 계속 글을 써 주셔요.” 하는 다소 생뚱맞은 말을 남기고 메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 메일을 쓸 때의 나, 그러니까 10분 전 내가 정말 나였나?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평소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콕콕 쑤시는 배 때문인가, 멀미하는 것처럼 울렁이고 머리가 아픈 탓일까, 내 자궁에 들은 콩알만한 존재가 나를 평소의 내가 아니게 만들었다. 난 이제 평생 예전으로 돌아가진 못하겠지? 또다시 절망이 밀려왔다. 그때 새 메일이 한 통 들어왔다. 그녀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댔으니 한심하다고 생각했겠지. 차마 메일을 열어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받은 메일함에 있는 새 메일을 10분 전 나인 듯이 노려보다 결국 마우스를 눌렀다. 장문의 메일에 놀랐고 그 안에 듬뿍 담긴 축하와 응원엔 눈물까지 찔끔 났다.
그녀는 자신도 나와 같은 나이에 임신해서 출산했다는 말로 내 불안을 달래 주었다. 출산에 대해 최대한 많이 공부하면 노산이어도 순산할 수 있다고. 힘들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달라고. 또 회사 주소를 보니 자신이 다닌 J 산부인과가 가까울 것 같다며 추천까지 해 주었다. 신기하게도 이미 내가 다니는 곳이었다. 의사가 항상 엄격한 표정을 짓고 냉기가 도는 말투로 설명을 해서 갈 적마다 기가 죽곤 했는데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선생님이 많이 무뚝뚝하지만 매우 좋은 분입니다. 특히 아기를 정말 예뻐하세요. 갓 태어난 저희 아기를 사랑스럽게 보며 다정하게 어르는 선생님을 보는데 출산해서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나지 뭐예요.’
바늘로 찌른다면 “그 정도로 피가 나오겠습니까, 더 찔러 보세요.”라고 할 것 같은 차가운 의사도 아기에게 녹아내린다니. 묘하게 안심이 됐다.
어쩌면 나는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나만 바라보는 아기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 주지 못할까 봐. 내 자식이 아닌 옆집 애처럼 데면데면 느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한데 그녀의 메일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의 자식일지라도(아무 관련이 없더라도) 새 생명의 탄생은 모두가 환영한다고. 누구의 아기여도 기쁘게 맞이하며 순조롭게 올 수 있도록 돕고 우리가 사는 이곳에 잘 적응하길 바란다. 그러니 내가 열 달 동안 품어 세상에 내보내는 아이는 당연히 더 특별하지 않을까. 사랑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특히나 그 아이가 나만을 바라보며 웃고 행복해하고 사랑해 준다면 더더욱. 받은 사랑의 곱절을 평생을 다해 아이에게 되돌려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나는 마음이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