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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r 12. 2021

나를 살린 말

“태낭이 보이네요. 아기가 아기집을 만드는 중입니다.”

병원에서 이 말을 들은 날부터 주변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현저히 달라졌다. 엄마는 매일 퇴근 시간만 되면 전화를 걸어 먹고 싶은 게 없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쏜살같이 달려와 “왜? 뭐 줄까? 자긴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 줄게.” 하고 나섰다. 회사 대청소 날에는 별생각 없이 빗자루를 집어 들었는데 상사가 조용히 빼앗더니 내 손에 가방을 쥐여 주었다. “먼지 날리니까 카페에 가 있어요. 끝나면 내가 연락할게요.”

계란 다루듯 조심스럽게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 사실 귀한 몸처럼 떠받들어 주는 게 기분 좋기도 했다. 한데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의 친절한 말이 귀에 거슬렸다.


회사 건물 1층에 있는 카페는 매일 가다시피 하던 곳이었다. 출근 전 들러 ‘오늘의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가는 게 내 낙이었다. 바리스타는 굳이 내게 무얼 마실지 묻지 않고 텀블러를 받아들곤 했다. 임신하고 난 뒤 나는 한동안 카페에 가지 못했다. 물 먹듯 커피를 마셔 왔고 위 출혈이 왔을 때도 의사에게 당당히 커피는 못 끊는다고 당돌하게 선언했었다. 한데 임신 초기에는 조심해서 나쁠 게 없겠다 싶어 꾹 눌러 참은 것이다. 안정기에 접어들고 일하는 내내 졸음이 쏟아지자 나는 카페로 가서 1/2 디카페인 커피를 주문했다. 바리스타는 내게 텀블러를 건네며 물었다. “근데 커피 드셔도 돼요?” “괜찮겠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매일 아침 들을 줄은 몰랐다. 바리스타가 바뀌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내 배를 쳐다보며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결국 나는 이어폰을 보란 듯이 끼고 가거나 다른 카페에 가서 누가 말을 걸까 봐 일부러 딴 곳을 응시했다.


그거 아기한테  좋은  아니야?” 남편내가 무슨 행동을  때마다  말을 했다. 잠을  자고 뒤척여도, 몸을 과격하게 움직일 때나 대개 임산부가 먹으면  된다고 여겨지는 음식을 먹으려  때에 그랬다.  말은 족쇄 같았다. 그런 논리면 나는 원하는 일을 하나도   없었다. 어느 , 바람을 쐬러 교외로 나가자고 했는데 남편은 단칼에 거절하며 이렇게 말하는  “요미야(태명), 엄마는 너를 생각하지 않는구나.” 그날 태교를 위해서라도 꼭꼭 잠가 두었던  화가 폭발했다.  일로 남편에게  마음속 앙금은 가시지 않고  오래 갔다.


우리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대보름에는 귀밝이술을 마셔야 한다는 걸 핑계 삼아 남편과 술판을 벌였다. 그때 나는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하고 친정집 안방에 누워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있었다. 왜 하필 거나하게 취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내 귀에까지 들렸을까. 아빠는 아직 나오지도 않은 손녀를 기다리며 그 애 혼자는 외로우니 둘째를 얼른 만들어야 한다고 했고 남편은 자기도 바라는 일이라며 실실 웃었다. 당시 임신에 대한 회의마저 들고 있는 터에 둘째 소리까지 들으니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빠와 남편은 술에 취해 얼굴이 붉어졌고 나는 화가 나서 시뻘개졌다. 나는 기다시피 부엌으로 가서 음식 냄새에 구역질을 하며 두 사람에게 쏘아붙였다. “이게 지금 두 분이 저한테 할 소리예요?” 문제는 두 사람 다 왜 그게 문제인지를 알지 못하는 거였다. 특히 아빠는 태연하게 임신해 힘든 건 어쩔 수 없고 그건 여자가 겪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이번에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 소란을 본 엄마가 달려와 일부러 더 심하게 아빠에게 지청구를 주며 나를 달랬지만 두고두고 내 가슴에 남았다. 한데 엄마 역시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너 임신했을 때 먹지는 못하고 토하기만 하다가 결국 입원했었어. 얼마나 힘들었다구.”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귀가 닳도록 들은 말이었다. 입덧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하자 엄마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한데 그 감정은 오래 가질 못했다. 배 속 손녀를 얼마나 챙기는지. “힘들어도 먹어. 아무것도 안 먹는 것보다 먹고 토하는 게 그나마 아기에게 영양분이 갈 거야.” 아기에게 엄마를 빼앗긴 기분마저 들어 서러움이 몰려왔다.

 

당시 회사 근처로 산부인과를 다녔는데 의사가 한 말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입덧 때문에 너무 힘들다 토로하는 내게 “임신 중에 입덧은 당연한 증상이에요. 물만 안 토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 앞에서 나는 입술을 깨물며 핑 도는 눈물을 참았다. 입덧약이 태아에게 해를 미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느냐며 약 처방을 1주일 치씩만 해 주었다. 나는 매주 점심시간에 병원에 가서 꽤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의사를 만나 입덧에 대한 충고를 듣고 처방전을 받아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이를 품은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오롯이 아이를 무사히 낳는 데만 쓰이는 존재로 전락했다. 입덧은 끝날 것 같지 않고 주변에서 매일 이런 소리만 하니 나는 우울하다 못해 정말 살고 싶지가 않았다. 사람들이 “늦은 나이에 아이가 생겼으니 얼마나 축복이니.” 이런 말을 할 때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쉬었다.


임신 24주차에 나는 산부인과를 전원했다. 아무래도 출산 때는 집 근처가 편할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인기가 많아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만난 산부인과 의사는 들어서자마자 내게 말했다. “입덧약을 너무 오래 드시는데 끊어 보시면 어때요?”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 먹으면 한두 번 토할 걸 서너 번 토하더라고요. 그거까지도 괜찮은데 밤에 위가 너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의사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차라리 위약을 먹으면 될 텐데.”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전에 다닌 산부인과에서는 위가 아프면 내과에 가라고 했고 내과에서는 임산부가 먹을 수 있는 약은 한정적이고 안 먹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굳이 먹을 거면 처방해 준다고 해서 처방전 가지고 약국에 갔더니 약사가 먹지 말라고 권유하면서 대신 처방전을 찢어 줬어요.” 속사포처럼 떠드는 내 말에 의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임산부가 먹을 수 있는 위약이 있어요. 제가 처방해 드리죠.” 그러자 슬그머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읽은 듯 의사가 말했다. “제가 보증할게요. 임산부가 먹어도 안전한 약이에요.” 용기를 얻은 내가 상의를 걷어올려 가슴 주변에 생긴 습진을 보이며 물었다. “피부과에서 임산부가 바를 수 있는 약이 없다며 면옷을 입고 얼음을 대주면서 참으라고 했어요. 혹시 여기에 바를 수 있는 약도 있나요?” 선생님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더니 간호사에게 방금 내린 처방전을 취소하고 약을 추가해 내보내겠다고 했다. “엄마가 있어야 아기도 있어요. 엄마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아기도 그래요. 무엇보다 산모가 우선이에요. 꼭 명심하셔야 해요.”


그 말은 임신 기간 내내 나를 어루만져 주었다. 다른 사람이 따가운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생각하면 치유가 됐다. 어쩌면 나도 받아들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아기를 걱정하지만 그건 결국 나를 위한 것이라는걸. 사실 가장 아기를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 그리고 의사의 말에 남편 역시 바뀌었다. 아니 원래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했다. “아기보다도 자기가 우선이라고.” 하지만 나는 짓궂게 대꾸했다. “나는 아기가 최우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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