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상승의 서막?!
미국 보스턴에 잠시 거주 중입니다. 이제는 구글맵 없이도 다닐 수 있을만큼 지리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은 이 도시의 물가입니다. 달러당 1400원대라는 기록적인 고환율과 살인적인 물가의 압박을 벗 삼아 지내는 이방인의 느슨한 도시 적응기를 전합니다.
'왜 하필 이때...'
일찍부터 예정돼 있었던 미국행이라 입국 시점을 고를 선택지라는 건 애초에 없었지만, 미국에 온 타이밍을 두고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인간 변동성' 그 자체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두번째 임기가 시작된 만큼 이번 행정부는 의욕적으로 경제와 이민 정책 등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방문 자격으로 잠시 왔지만 정책 기조에 따라 자칫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지 여러모로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4월 2일 상호관세 발표일을 앞두고 전세계 뿐 아니라 나의 통장도 긴장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을 'Liberation Day;해방의 날'이라고 부른다. 그간의 무역 관행이 불리하다는 이미지를 부각해 이를 자국 중심으로 재조정한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정치적 수사다. 트럼프가 과거 해방의 날이라고 명칭한 날은 지난해 대선일(11월)과 올해 1월 취임식 정도. 정권 교체만큼 관세의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해방의 날' 당일에 어떤 내용이 발표될 지 좀 더 봐야겠지만 미리 예고된 경제적 쓰나미를 고려해 발 빠르게 대비에 들어간 우리 기업도 있다. 얼마 전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국내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210억달러(약 31조원) 규모 투자 계획을 밝혔다. 앞서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투자 발표를 한 곳과 같은 자리. 넘사벽처럼 느껴졌던 그 자리에 국내 기업인이 올라선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백악관에서 정의선 회장이 연설하는 뉴스 장면에서 현대차 그룹 계열사 사장단의 얼굴이 잠깐 잡혔는데 취재 현장에서 여러 번 뵈었던 분들의 얼굴도 보여 감회가 새로웠다.
정부의 공백이 길어져 한국의 외교 기능이 약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와중에 국내 기업이 선제적으로 시장에서 존재감을 보여주니 안도감이 들었다고나 할까. 물론 현대차그룹의 생산 거점이 해외로 빠지면서 중장기적으로 한국 산업에 미치는 악영향도 있겠지만 일단은 관세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니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보여진다.
트럼프의 행보를 두고 미국 내에서도 불안감이 큰 것 같다. 제조업을 부흥시켜 일자리 창출 효과를 낼 것이라는 트럼트 정부의 선언이 있지만 실현되기까지 최소 3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 경제학자들과 언론은 당장 자동차와 식료품, 주택 가격 상승이라는 형태로 관세가 소비자에게 전가돼 경기 침체와 소비 위축으로 중산층의 삶이 팍팍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 연준 총재도 이번 관세정책으로 인한 인플레가 일시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 와중에 원달러 환율은 2009년 금융위기 수준까지 올라와 나의 통장은 이중고를 겪을 전망. 공포스럽게도 올 연말 원달러 환율은 1500원을 넘길 수 있다는 해외 증권사의 보고서도 나온다. 가능성이 낮다고는 하지만 마음을 놓기 어렵다.
경기 악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내 자산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 기술주들의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있으니 선견지명을 갖지 못한 주인을 만난 나의 통장은 삼중고를 겪는다고 할 수 있겠다. 코스피도 힘을 같이 못 쓸 테니 사중고, 보유해 놓은 달러나 금도 없으니 첩첩산중이다.
결제 단말기에 신용카드를 탭(tap) 할 때마다 찍히는 금액을 원화로 환산하면 적은 금액이라도 마음이 복잡하다.
최근 가장 큰 금액을 지출한 대상은 자동차였다. 중고차 거래 플랫폼 카맥스를 통해 닛산의 SUV를 구매했는데, 5년 이상된 중고차임에도 수수료, 보험비, 주차비(보스턴 지역은 주차난이 심해 거주하는 아파트에서도 주차비를 받는다)등이 붙으니 국내에서 신차를 살 때의 가격이 나와 황당했다.
중고차를 사기로 결정했다 보니 사고 이력이 없는 차가 구매의 1순위 조건이었다. 차량 구매를 위한 금액이 한정적인 상황에서 환율이나 차 가격이 지금보다 조금만 올라갔다면 사고 이력이 있는 차라도 '감사합니다' 하며 타야 했을 것이다. 이번 관세 기조로 신차 가격이 올라가면서 중고차 가격은 앞으로 더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소비자로서 선택지가 좁아지는 일은 당분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