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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미술관에서 DJ 파티가 열린 이유  

존경받는 대학이란

by 캠브릿지브런치 Mar 2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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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에 잠시 거주 중입니다. 하루 이틀이면 대부분의 랜드마크를 둘러볼 수 있을만큼 작은 도시이지만 미국 역사가 시작돼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러 곳에 붙을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입니다. 보스턴 도심 북서쪽의 캠브리지에는 하버드, MIT 등 명문 대학도 있어 교육 도시로 손꼽히죠. 전세계 러너들의 꿈의 무대인 보스턴 마라톤은 올해 129년차 대회를 맞이합니다.

이제는 구글맵 없이도 다닐 수 있을만큼 지리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은 이 도시의 물가입니다. 달러당 1460원대라는 기록적인 고환율과 살인적인 물가의 압박을 벗 삼아 지내는 이방인의 느슨한 도시 적응기를 전합니다.
하버드 미술관에서 열린 'Havard Art Museums at Night' 행사하버드 미술관에서 열린 'Havard Art Museums at Night' 행사

지하철을 타고 Red line의 하버드스퀘어 역에 내렸다. 3월 초부터 적용된 서머타임으로 저녁 시간이 길어진 덕분에 오후 6시 반인데도 하늘은 여전히 대낮처럼 시퍼런 빛이 돌고 있었다.


하버드스퀘어 역을 빠져나오면 하버드 대학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는 교문이 바로 나온다. 오늘의 목적지인 하버드미술관(Harvard Art Museums:HAM)에 가려면 하버드 대학 캠퍼스를 가로질러 가는 게 제일 빠른데, 무슨 일인지 이날은 관계자 한 명이 하버드 야드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교문 앞에는 캠퍼스에 들어가지 못하는 무리들이 쌓여 길을 막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날 오전 10시 30분부터 캠퍼스에 들어가려면 학생과 교직원처럼 하버드 신분증(HUID)을 보여줘야 하는 임시 규정이 생겼다고 한다. 내 뒤에 서있던 한 학생(으로 추정)은 ID카드가 잘 보이도록 손을 번쩍 들어 관계자에게 보여줬고, 허가를 받은 그 혼자 여러 무리 사이를 뚫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 터프츠(Tufts) 대학 유학생이 구금된 사건과 무관치 않다. 튀르키예 국적의 이 유학생은 미 정부의 친(親) 이스라엘 태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이민당국에 체포돼 루이지애나주에 위치한 이민당국 구금시설로 이송된 사건이 지역지 보스턴글로브 등을 통해 보도됐다. 최근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대대적으로 유학생들의 비자를 취소시키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 미국 현지에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위기인데, 이 여파가 근처 대학인 하버드에도 미친 것이다. 터프츠대 주변에서는 수백 명이 모여 해당 유학생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가 있었는데, 하버드에도 이와 비슷한 작은 시위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학교 측은 문제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외부인 통제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캠퍼스 출입이 막힌 탓에 하버드 밖 주변 거리를 따라 뱅- 돌아서 미술관으로 가야 했다. 미술관의 주변 거리는 한산했다. 외관만 봐서는 미술관이 열었는지 닫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무겁게 닫혀있던 미술관 문을 열자 '두구두구쿵쿵쿵(전자 음악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의성어를 알지 못해 이렇게 씁니다...) 하는 음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입구에서 출입을 관리하는 직원이 질문했지만 음악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렸다. 무슨 말인지 다시 되물었을 때, 그는 사전 예약을 했냐고 했다. 예약한 이의 성(last name)이 무엇인지 간단히 확인한 뒤 들여보내줬다.


로비는 이미 사람들로 차있었다. 마실거리를 하나씩 들고 밍글링mingling 중인 인파 한편에서 DJ는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바쁘게 살피고 있었다. 옷 스치는 소리만 들릴만큼 조용한 미술관의 일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버드 미술관에서 뭉크전을 관람하는 관람객들하버드 미술관에서 뭉크전을 관람하는 관람객들


미술관에서 열리는 'Havard Art Museums at Night' 행사는 방문객 모두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행사다. 이번 달은 하버드 미술관이 최근 기획한 뭉크 특별전을 기념하기 위해 이벤트를 연 것이다. 온라인으로 사전 예약을 받긴 했지만 인원수 관리를 위한 예비적인 용도였고, 예약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행사 당일 출입할 수 있다. 특별전 외에도 모네, 드가, 반고흐, 피카소 등 유명한 작가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미술관 파티라는 건 영화에서나 봤던 한 장면으로 특권층이나 예술 종사자들이 향유할 수 있을 것처럼 허들이 높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버드는 모든 방문객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한 번 이런 행사를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 하버드 미술관 홈페이지를 보니 이 야간 행사는 매달 마지막 목요일 오후 5시부터 오후 9시까지 진행된다고 한다. 이날 유료였던 건 미술관 로비에서 판매하는 음료(술 포함)와 식사(벤또) 정도 뿐이었다. 시간만 내면 누구나 미술 전시를 관람하고, 음악을 듣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런 특별 이벤트만 무료인 것이 아니다. 하버드는 2023년 6월 말을 기점으로 유료 입장을 없애고 미술관을 전면 무료화했다. 그전까지 성인의 경우 20달러의 입장료를 내야 했다.


President Lawrence S. Bacow said, “Art is for everyone, and the Harvard Art Museums will now be free to all visitors. This initiative ensures that every visitor to our campus will have the opportunity to view and engage with the phenomenal collections in our care.


사실 전면 무료화 정책을 내세우기 전에도 캠브릿지 거주자나 하버드 신분 소지자 정도는 무료 입장이 가능했고 일요일과 목요일에도 무료 개방하는 날이 있었다. 하버드매거진에 따르면 당시에도 이미 관람객의 80%가 무료로 미술관을 관람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하버드 총장이었던 로렌스 바코우는 예술에 대한 문턱을 없애고 모든 이들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전면 무료화를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방문자 모두에게 예술 향유의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는 한 대학이 있어 이곳에서는 누구나 창작의 즐거움을 느끼고 문화적 소양을 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버드 대학 기념품 샵(COOP)은 보스턴 여행의 필수 코스다하버드 대학 기념품 샵(COOP)은 보스턴 여행의 필수 코스다

그럼 하버드 미술관은 돈을 어떻게 버는데? 라는 의문이 생기는데 록펠러 가문의 기부가 이런 파격적인 정책을 가능케 했다. 석유 재벌 존 D 록펠러의 손주인 데이비드 록펠러는 지난 2008년 하버드에 1억달러(약 1300억원) 기부를 했는데 이중 3000만 달러는 미술관 연구에 쓰이고 있다고 한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하버드 대학 졸업생이기도 하다.


록펠러를 비롯한 졸업생들의 든든한 후원 속에서 하버드는 미국 대학 중 가장 많은 기부금을 유치하고 있다. 기부금과 투자 수익으로 쌓인 하버드 대학교의 기금(endowment fund)은 2024년 기준 532억달러(약 78조원)으로 집계된다. 기금 운용 기준 전세계 4위 수준인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의 운용자금(1185조원)의 약 7% 수준. 2023년 미국 CBS 보도에 따르면 하버드의 운용기금은 튀니지, 바레인, 아이슬란드 등을 비롯한 120개국 이상의 GDP보다 크다. 한 대학이 굴리는 운용자금이 주요 국가의 GDP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마주하면 하버드 대학이 세계 자본시장에서 갖는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버드 대학의 경제적 기반은 어느 대학도 따라가기 어려운 사회 환원뿐 아니라 인재 유치도 가능하게 한다. 얼마 전 하버드 대학은 2025-26학년도부터 중산층의 지원폭을 늘리기로 해 다시금 주목받았다.


지원안은 파격적이다. 연소득 10만달러(약 1억4000만원) 이하 가정의 학생들에게 등록금, 수업료, 기숙사비, 주거비, 건강 보험 등 학교 생활에 필요한 사실상 모든 재정적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하버드 대학에 따르면 이번 재정 지원으로 미국 가정의 약 86%가 하버드의 재정 지원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역시 든든한 재정 기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앞선 교육관과 대대적인 사회 환원으로 하버드는 모두가 선망하는 대학이라는 명성을 굳건히 이어가고 있다.    

“Putting Harvard within financial reach for more individuals widens the array of backgrounds, experiences, and perspectives that all of our students encounter, fostering their intellectual and personal growth,” said Harvard University President Alan M. Garber in the announcement.


명문 대학조차 재정 악화에 시달리는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존폐 위기에 놓여있는 대학 앞에서 미술관 무료 개방, 장학금 확대를 논하는 것은 사치다.


우리나라 대학들도 자체 운용 기금을 갖고 있지만 그 규모가 크지 않다. 등록금과 정부 지원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보니 재정 건전성이 좋지 않다. 사립대 뿐 아니라 국립대까지 재정난을 이유로 등록금 인상을 시도하고 있다. 일부 대학의 경우 지난해부터 이어진 의대생들의 휴학으로 고작 수십억의 등록금이 들어오지 않아 재정이 휘청했을 정도다.


물가는 상승하는데 학비와 생활비 중 많은 부분을 대출에 의존해 학업을 이어가는 대다수 학생들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학령인구의 감소는 대학의 위기의 주요한 원인으로 꼽히지만 저출생에 따른 인구 감소는 누구나 예상했던 바다. 기금 조성 명목으로 그간 학생들에게 거둬갔던 돈들은 불필요할 정도로 보수적으로 운용해왔던 것도 답답한 부분이다. 해외 대학 기금들은 안전자산뿐 아니라 주식과 대체투자 자산에 분산 투자해 수익률을 적극적으로 끌어올리지만 우리 나라 대학 기금들은 소극적인 운용 방침을 고수해왔다. '반값 등록금'이라는 용어가 생길만큼 등록금 인하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컸던 시기에 학부를 다녔던 입장에서 20년이 다 되어가도록 진전이 없는 교육 현장의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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