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계란 대란
미국 보스턴에 잠시 거주 중입니다. 하루 이틀이면 대부분의 랜드마크를 둘러볼 수 있을만큼 작은 도시이지만 미국 역사가 시작돼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러 곳에 붙을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입니다. 보스턴 도심 북서쪽의 캠브리지에는 하버드, MIT 등 명문 대학도 있어 교육 도시로 손꼽히죠. 전세계 러너들의 꿈의 무대인 보스턴 마라톤은 올해 129년차 대회를 맞이합니다.
이제는 구글맵 없이도 다닐 수 있을만큼 지리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은 이 도시의 물가입니다. 달러당 1460원대라는 기록적인 고환율과 살인적인 물가의 압박을 벗 삼아 지내는 이방인의 느슨한 도시 적응기를 전합니다.
미국에 온 후 우리 2인 가구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외식을 크게 줄였다는 점이다. 서울에서는 맞벌이 부부로서 평일 아침, 점심, 때때로 저녁까지 집 밖에서 해결하는 일이 잦았다. 큰 마음 먹고 장을 보더라도 미처 쓰지 못한 식재료가 상해버려 버리기 일쑤였다. 집밥을 하려면 재료를 일일히 다듬고, 조리하고, 설거지도 해야하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도 귀찮은 것도 물론 있었지만 약간의 배달비를 부담하더라도 배달의 민족과 쿠팡 잇츠로 한 끼 때우는 게 차라리 돈을 아끼는 것이라고 위안 삼았다.
고환율과 치솟는 물가는 우리의 게으름을 단숨에 고쳐줬다. 배달음식은커녕 외식은 멀리하고 집밥만 먹는다. 덕분에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자주 한식을 먹는다.
가장 저렴한 외식 메뉴인 프랜차이즈 햄버거조차 세트를 주문하면, 한 사람당 우리 돈 1만6000원을 훌쩍 넘긴다. 배우자와 함께 간단히 때우러 들어간 치폴레에서 브리또 보울을 2개와 음료 2개를 시켰는데 5만원이 긁혀 '헉'소리가 절로 나왔던 기억은 강렬히 남아있다.
몇번의 지출로 이곳의 물가를 뼈저리게 체험한 후 미국에서의 소비 생활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됐다. 이미 아파트 렌트비와 자동차 보험 등으로 한 달에 고정비가 수백만원이 넘게 나가는 상황. 일상이었던 외식은 말 그대로 '기념일'에나 하는 호사스러운 행위로 삼기로 했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트레이더조는 매일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출근지가 됐다.
있을 게 다 있다는 미국 마트에 요즘 없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달걀이다.
미국에 오기 전 조류 인플루엔자의 여파로 현지에서 달걀 구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외신 기사를 봤는데, 미국에 실제로 오니 아직까지도 계란 대란은 이어지고 있었다.
달걀값이 올라갔다고 하지만 트레이더조에서는 달걀을 여전히 3.5달러에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운이 좋아야 건질 수 있다. 평일 낮에는 재고가 없어 냉장고가 텅텅 비어있을 때가 부지기수였다. 어느 날은 달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치즈나 우유가 대신 채워져 있었다.
트레이더 조 직원에게 계란 재고가 언제 들어오는지 물어보니 보통 오후 8시 반에서 9시 사이 들어온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9시 30분쯤 트레이더 조에 갔더니 달걀이 들어와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계란을 사려는 사람은 우리 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의 홀푸드마켓이나 H마트에서도 계란을 살 수 있었지만 한 판 가격이 10달러를 넘어가는 날도 있다 보니 가급적 트레이더조에 달걀이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타이밍을 보고 사러 갈 수밖에 없었다.
달걀이 들어왔다고 해도 마음껏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트레이더조는 일찍 품절될 것을 우려해 가정마다 One Dozen을 사가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3월이 끝나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달걀 가격은 미국인의 삶에서도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달걀 가격의 상승은 미국 물가 상승의 주범으로 거론된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지난 2월 조류인플루엔자로 산란계 닭의 약 15%가 몰살됐고, 이로 도매 계란 가격이 12개(1 dozen)당 8.50달러 이상으로 치솟았다. 조류인플루엔자로 미국에서는 2024년 산란계 닭 4000만 마리 이상이 줄었는데, 올해는 첫 두 달 동안만 3100만마리가 줄었다고 한다. 외식 물가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소규모 외식업을 하는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달걀 대란을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취재해 기사를 냈는데, 기사에 따르면 이들 외식업체는 가격을 올리거나, 레시피를 바꾸거나, 계란이 안들어간 메뉴로 바꾸거나, 계란 파우더로 대체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한다.
These business owners are getting creative: changing recipes; using liquid or powdered eggs, which haven’t gotten as expensive as quickly; and selling whatever items they can that don’t include eggs — things like falafel or packaged snacks or even fresh flowers.
이곳 현지 언론에 따르면 다행히 3월 초부터 조류독감의 발병이 줄어들면서 계란 물가가 잡혔다고 한다. 8달러를 넘어섰던 1더즌의 가격은 전국 평균 4달러 수준으로 떨어지는 추세라고 한다. 하지만 계란의 유통기한은 일반적으로 4주가 걸려 마트에는 아직 계란 재고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고, 소비자들 역시 변화를 느끼기 어려운 상황이다. 당장 4월에 부활절이 있어 대규모 달걀 수요도 이어질 예정이라 가격이 잡힐 지 미지수.
Wholesale egg prices, which is what retailers pay to procure eggs, have fallen to a national average of just over $4 for a dozen large white eggs, down from a peak of more than $8 at the end of February, according to data from the Agriculture Department released last week.
이런 가운데 한국산 계란 수입 소식이 들린다. 미 농무부 장관이 달걀 공급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달걀을 더 많이 수입할 것이라는 코멘트를 하면서다. 미 농업 시장 분석 전문지 Pro Farmer의 보도에 따르면 최근 충남 아산시의 한 농장은 이달 국내 최초로 특란 20t을 미국 조지아주로 수출했다고 한다.
아직 수입량과 기간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계란 부족 사태가 이어지면 보스턴에서도 한국에서 들여온 계란을 먹게 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