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보다는 음악 시간이 즐거웠으면
새삼스럽지만 공부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정확히 말하면 그 근성이 부럽다. 분명 싫어하는 과목이 있을 텐데, 그 괴로움을 참고 기어이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내는 걸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 말은 물론 내가 공부를 별로 잘하지 못했다는 얘기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40명 중에 20명 안쪽에 간신히 드는 수준이었는데, 이유는 당연히 싫어하는 과목의 점수가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수학과 음악이 그랬다. 수학을 못한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 땅의 수많은 수포자들이 그랬듯, 못해서 싫었고, 그 때문에 더 싫어졌고, 그래서 더 못하게 된 거니까. 물론 유독 사악한 선생님들 중 다수가 수학과목을 맡고 있다는 것도 꽤 컸다.
그렇다면 음악은? 일곱 살 때 피아노 학원에서 일주일 만에 쫓겨나다시피 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심각할 정도로 습득이 느렸다는데, 그때 학원의 원장 선생님이 엄마에게 “아드님께서는 아마 다른 재능이 있으실 겁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특정한 분야에서 재능이 없음을 타인에게 처음 확인받은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오선지와 음표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는 아이로 자랐다. 당연히 학교 선생님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클래식과 가곡도 좋아하지 않았다. 차라리 듣기만 했으면 참아볼 만 했을 텐데. 좋아하지도 않는 가곡들을 현기증이 날 때까지 리코더로 연주해야 하는 일은 내게 수업이라기보다 고문에 가까웠다. 한 번은 가곡 <스와니 강>을 리코더로 연주하는 수행평가가 있었는데, 반 친구들이 쉬는 시간에 리코더로 벼락치기 연습을 하는 통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강렬한 소음에 노출되면 어지럼증이 생길 수 있다는 걸 그때 체험했다. 그 두 과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학교는 한층 더 싫어질 수 있었다.
음악 시간이 재미없을 때는 교과서 맨 뒤에 짤막하게 기술된 대중음악 파트를 펼쳤다. 사실 파트라는 단어가 민망할 정도로 현대 대중음악에 대한 설명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한 페이지에 비틀즈를 위시한 록과 재즈, 팝송의 역사, 다른 한 페이지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적힌 게 다였다. 바흐와 베토벤의 음악을 듣거나 현기증 나게 리코더를 불어야만 할 때면 언젠가는 이 파트를 배울 날이 있겠지 하며 남은 시간을 버텼다. 보면서 생각했다. 적어도 교육부 검정 교과서라면 레드제플린과 주다스 프리스트 정도는 나와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블루스와 컨트리의 결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채로 록이라는 단어만 떡 붙여놓으면 그게 록인지 아닌지 알게 뭐야. 어쨌거나 졸아서 혼이 나는 것보다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대중음악 파트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2학기가 되고, 드디어 맨 뒤에 있는 대중음악 파트를 공부할 차례가 왔다. 솔직히 기대는 하지 않았다. 대개의 예체능 이론수업이 그렇듯, 기말고사에 한 두 문제쯤 나온다는 언질을 준 다음 휙 넘어갈 게 뻔했으니까. 그 순간, 음악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이 부분은 일로가 한 시간 동안 가르쳐 줄 거야. 일로는 다음 시간까지 자료 준비해오고. 알았지?(내가 록음악을 듣는다는 건 또 어떻게 아셨을까.)”
“엥? 제가요?”
“이거 수행평가에 반영되는 건데, 싫으니?”
“하겠습니다!”
대학교 발표수업 때도 50분을 통째로 배정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걸 생각하면 결코 작은 숙제는 아니었다. 수업시간 내내 교과서 맨 뒤편의 비틀즈 사진만 쳐다보고 있는 것에 대한 벌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선생님의 제안을 덥석 받은 건 순전히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커뮤니티에 훌륭한 스승들이 차고 넘쳤으니까. 커뮤니티 자료실에 들어가면 블루스와 컨트리 뮤직의 결합부터, 1990년대 이후 메탈에 이르기까지의 변천사를 담은 글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글들은 한결같이 회원들의 남다른 공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순히 장르의 특성을 흐름대로 적어놓은 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스타일의 등장이 당시 영미권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까지 맥락을 짚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80년대 헤비메탈의 등장과 레이거노믹스의 대두가 미국 노동자 계층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식이었다. 지금 보면 한없이 길고 지루한 글들이었는데 당시 내게는 그것들을 읽는 게 드라마 <다모>를 보는 것만큼이나 재밌는 일이었다.
사실 걱정은 다른 데 있었다. 나 빼고 모두가 이 수업을 재미없어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인 당시에도 헤비메탈은 이미 ‘죽은 트렌드’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그것도 본고장인 미국에서. 하물며 한국에서는 오죽할까. 내가 어떤 설명을 하든 점심시간 학교 방송실에서 틀어주는 보아의 <My Name> 한 곡을 이기지 못할 게 뻔했다. 적어도 이 학교에서만큼은 메탈리카보다 보아가 더 위대한 것이다.
막상 당일이 돼 보니 그 걱정은 내 수업을 듣지 않으면 시험문제 두 개를 날려먹을 수 있다는 음악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모두 정리됐다. 록의 역사고 자시고 내신성적이 필요한 인간이라면 무조건 들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음악 선생님의 보호 아래 수업을 진행하니 생각보다 쉽게 입이 풀렸다. 입이 풀리자 슬슬 자신감도 붙었다. 이게 교육감 참관수업이래도 좋을 것 같았다. 자 보세요! 교과 과정에서 대중음악을 가르친다는 건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랜 시간을 정신없이 혼자 떠들었다. 블루스와 컨트리가 섞인 음악이 나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1980년대 초반의 헤비메탈이 당시 영국 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지금의 트렌드는 어떤지. 아이들의 눈꺼풀이 무거워질 조짐이 보이면 음악을 틀었다. 마음 같아선 레드제플린과 에릭클랩튼의 위대함을 오랜 시간 알려주고 싶었으나, 일단 시끄러워야 애들이 졸지 않을 것 같아 메탈리카와 림프비즈킷의 음악을 맥락 없이 먼저 들려줬다.
그 수업을 아이들이 재밌게 들었는지 아닌지는 그때도 지금도 모른다. 다만 달라진 첫사랑의 반응만큼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자우림의 김윤아처럼 되는 게 꿈인 같은 반 친구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 강의 이후로 느낀 게 있었는지 그날 밤 들을 만한 음악을 추천해 달라는 전화가 왔다. 보낸 문자도 씹히던 과거를 생각하면 내게 있어 그건 역사적 쾌거였다. 그 전화를 계기로 우리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장국영과 솔로 앨범을 낸 김윤아를 주제로 꽤 긴 시간 통화하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게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래도 좋았다. 이런저런 사소한 용건으로 연락이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부질없는 짝사랑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 순간 행복했으면 된 거니까. 당연히 이 모든 영광은 내게 록의 역사를 강의할 기회를 준 음악 선생님 덕분이었는데,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제대로 드리기도 전에 출산휴가를 떠나셨고, 그 다음 학기에 전근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의 경험 이후 음악시간이 조금은 더 즐거워졌음은 물론이다.
학교 음악시간이 더 자유롭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아무렴 그때보다 17년이나 시간이 흘렀으니 어련히 더 재밌어졌겠냐만. 그래도 그보다 더 재밌을 수 있다면,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다양한 종류의 대중음악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는지 배우는 것도 학교의 역할일 수 있으니까. 그게 트로트든, 힙합이든, 메탈이든. 해서 세대가 거듭될수록 즐거운 음악시간이 되기를. 스스로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는 건, 그 무렵 학교에서 겪는 사소한 즐거움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