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re friends of moon and star. Now you are one of us. Welcome.
(우리는 어둠의 자식들. 우리는 달과 별의 친구. 이제 너도 우리들 중 하나. 환영해!)
2003년 여름, 이리저리 뒤척이다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며 잠들기 좋은 방송을 찾고 있었다. 순간 들려오는 음침한 시그널 뮤직. 그리고 갑자기 훅 들어오는 저음의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이 궁금해 컴퓨터를 켜고 라디오 주파수와 편성표를 검색했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 그게 처음이었을 것이다. 신해철이라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게. 당시만 해도 그에 대해선 관심도 아는 바도 없었다. 그저 좀 유식하고 논쟁하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기억할 뿐. 이 사람, 라디오도 하네? 시사토론이나 수요 예술무대의 라디오 버전이려나?
지금 내 눈의 다크서클은 저때 생겼다.
잠자코 들어보니 상상 밖이었다. 모든 청취자들이 그를 마왕이라 부르며 반말로 대했다. 그는 청취자들을 식구라 통칭했다. 분명 남녀노소 모두를 위한 방송은 아니었다. 뭔가 신흥종교의 야간 교신을 엿듣는 듯한 기분. 새벽 방송이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그의 라디오에선 노래를 끊어먹는 그 어떤 멘트나 광고도 나오지 않았다. 상품을 목적으로 꾸며낸 상투적인 사연도 없었다. 진행 또한 제멋대로였다. 그는 라디오를 시작하자마자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 이야기로 운을 뗐다. 그 이후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라디오를 진행하는 내내 돌비라 부르는 고양이가 어디선가 자꾸 야옹댔기 때문이다. 그는 숨어있는 고양이를 찾겠다며 잠시 진행을 멈추고 노래를 틀었다. 한 곡도 아니고 두 곡씩. 나는 직감했다. 이 방송, 정상은 아니구나. 그게 왠지 싫지 않았다. 그의 예측 불가능한 진행과 식구들의 반말 사연은 ‘나도 저기 한 번 껴볼까?’싶은 도전의식을 갖게끔 했다. 해서 기꺼이 비정상이 되기로 했다. 시그널 뮤직의 가사처럼 어둠의 자식이 된 것이다.
그는 라디오를 진행하는 몇 년간 여러 이벤트를 열었다. 늘 먼저 떠오르는 건 욕 콘테스트다. 혐오 표현이나 육두문자를 쓰지 않고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는 표현을 겨뤘던 대회다. “스팸메일 받고 좋아서 답장 쓸 놈아” “열대야 아주 심한 밤에 컴퓨터 뒤편에 찰싹 붙어서 팬에서 나오는 열로 익혀질 놈아!”가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외에도 많은 식구들이 콘테스트에 참여했는데, 나는 “귓구멍에 살이 쪄서 내 말이 안 들리냐?” “스타크래프트 무한 맵에서 평생 미네랄이나 캐라!”라는 욕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다음 열린 건 사기 콘테스트.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얘기를 그럴듯한 거짓말로 포장해서 식구들을 현혹시키는 대회였다. 그는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달에 토끼 모양의 자국이 있는 이유를 그럴듯한 거짓말로 설명했다. 부처님이 보리수나무에서 몇 날 며칠을 굶어가며 정진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토끼가 장작불 앞에 몸을 던져 자신의 몸을 공양했단다(그래봐야 부처님은 드실 수 없을 텐데…). 토끼의 헌신을 가슴 아프게 여긴 부처님이 “너는 달이 되어라”말씀하셨고, 그 후 토끼가 하늘로 승천해 달이 되었다는 전설이 인도에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뻥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한 동안 그 이야기를 진짜로 믿었다.
단순히 시시껄렁한 이야기만 하면서 시간만 때운 건 아니었다. 매주 수요일 상담코너인 ‘좀 놀아본 오빠의 미심쩍은 상담소’에 날아온 가정폭력 사연을 듣고 같이 분노하거나, ‘노 퍼니시’라는 체벌 반대 카페를 개설해 운동 노선을 놓고 밤새 토론하기도 했다. 그는 식구들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와 그 반응들을 지켜보기도, 자신이 직접 개입해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의 의견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한 적은 사실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적어도 타인의 고통이나 부조리 앞에서 하나마나한 말을 건네는 어른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의 말과 음악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게 나의 정체성과 세계관이 됐다.
사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건 그가 풀어내는 음악 이야기였다. 특정 장르를 놓고 일주일 가까이 특집으로 꾸릴 때도 있었다. 그는 헤비메탈과 디스코의 흥망성쇠를 당시 히트곡들을 틀어주며 꽤 긴 시간 설명을 이어갔다. 그 덕에 나는 로니 제임스 디오의 일대기, 지미 핸드릭스와 지미 페이지의 스타일 차이, 샤우팅 창법의 기원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반 헤일런이 얼마나 위대한 기타리스트인지도 그때 알았다. 정말 덕후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아티스트들의 에피소드들도 그때 들었다. 이를테면 건즈 앤 로지스의 보컬 액슬 로즈가 어떻게 관중들과 주먹다짐을 하게 됐는지, 메탈리카와 메가데스가 왜 서로 앙숙이 됐는지 따위의 이야기들. 밤이 깊어가고 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나는 그 방송이 오직 나를 위한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새벽마다 울고 웃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졸업반이 되고 몇 달 안 들은 사이에 디제이가 바뀌어 있었다. 식구들끼리 교류하던 커뮤니티도 그 무렵 같이 없어졌다. 조만간 나온다던 새 앨범은 몇 년째 소식조차 없었다. 4학년 2학기. 취업 준비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나 또한 그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TV를 보면서 밥을 먹는데 뜬금없이 서태지가 <슈퍼스타 K6> 생방송에 나와 마왕이 많이 아프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엥? 마왕이 아직도 병원에 있다고? 다이어트 때문에 위 축소 시술 받는다며. 그거 간단한 시술이라 그러지 않았어? 분명 얼마 전 jtbc<속사정 살롱>에 나온 걸 본 것 같은데.
가끔 그립다. 사실 아직도 실감이 안난다. 아직도.
며칠 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슬프다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의료사고도, 그의 죽음을 바라보는 매체의 반응들도 전부 어이가 없었다. 그가 떠난 날 포털사이트 뉴스 섹션에는 신해철의 생애, 넥스트, 2002년 대선, 노무현이라는 키워드로 수십만 개의 기사들이 생산되고 있었다. 그가 만든 곡 <껍질의 파괴>와 <오버액션 맨>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말해주는 기사는 거의 없었다. 밤마다 식구들의 고민을 수도 없이 들어주던 그는 정작 자신이 불행해지자 그저 수십만 조각의 키워드로 소비될 뿐이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타인의 불행 앞에서 이토록 하나마나한 말들이 많을 수 있구나. 다들 그가 몸담았던 대선 캠프 시절 연설에 관심이 있을 뿐, 그의 음악적 업적을 이야기하는 기사는 찾기 힘들었다. TV 뉴스에선 음악 평론가들이 나와 장황하게 그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 모습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모노크롬이랑 비트겐슈타인 앨범 얘기는 한 마디도 안 나오네. 그 앨범에 들어간 제작비가 얼마인지는 알까? 보나마나 들어보지도 않고 말하는 거겠지.’ 한동안 화가 나 있었다.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오랜 시간 뉴스도 신문기사도 읽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면 늘 이어폰을 낀 채 하염없이 걸었다. 걷고 걷다가 집 근처 공원을 빙 둘러 갈 때쯤이면 어김없이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틀곤 했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풀냄새 한 숨 들이켜고 나면 잠시나마 다른 세상으로 도망쳐 나온 것 같았다. 그 무렵 내 주변엔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는 각오로 살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어른들 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도피란 선택의 연장이다. 맞서지 않고 도망치는 길 역시 거저 생기는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내게 지옥이란 선악의 결과물도, 특정한 장소의 개념도 아니다. 출구 하나 없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내야만 할 때, 지옥은 바로 그곳에 있다. 교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 내내 나는 늘 어딘가로 숨어들 곳을 찾았다. 출구가 없다고 느낄 때마다 도피처가 되어 준 것은 언제나 그의 노래와 말들이었다.
그로부터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은 많지 않다. 살아가면서 출구가 없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오는 것 역시. 아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그의 노래를 듣는 게 버겁게 다가온다는 사실일 것이다. 마왕이 떠난 지 6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해에게서 소년으로>를 듣고 있으면 다음 주 MBC <라디오 스타>에 그가 나올 것만 같다. 나는 그게 너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