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로 Mar 06. 2024

계란이면 괜찮다, 다 괜찮다



그린사람: ㅅㅂ 



살다 보면 이따금 처음 보는 문화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보통 외국으로 여행을 다닐 때 그런 일을 겪곤 하지만, 일상에서도 이따금 그런 순간들이 찾아온다. 중학교 때 컴퓨터로 1989년 메탈리카의 모스크바 공연을 봤을 때가 그랬고, 처음으로 가 본 부산의 목욕탕에서 때밀이 기계를 봤을 때가 그랬다. 대학 시절 <스키야키>라는 영화를 봤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엄청 감동적이었기 때문은 아니고, 일본 사람들이 날계란에 밥을 비벼먹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서다.     


영화에선 교도소 수감자 다섯 명이 방에 모여 각자 자신이 먹어본 최고의 음식들을 이야기한다. 듣는 이들이 ‘먹고 싶어!’라고 절규하면 점수를 얻는 일종의 경연이다. 당연히 가장 많은 사람들을 절규하게끔 하면 이긴다. 우승자는 설날 특식으로 나오는 도시락 반찬을 마음대로 가져다 먹을 수 있다. 


첫 번째 주자는 유흥업소 호스트로 일하던 슌스케. 업계에서 잘 나가던 그는 다른 호스트에게 고객을 모두 빼앗기자 상대에게 중상을 입히고 가게의 돈을 모두 털어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도망친다. 무려 10년 만의 귀가. 어머니는 만신창이가 된 아들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참깨를 뿌린 토마토와 대파가 잔뜩 들어간 된장국, 그리고 흰 쌀밥에 날달걀 한 소쿠리로 상을 차려준다. 슌스케는 밥 위에 버터를 한 덩이 올린 뒤 날달걀을 깨서 밥 위에 올려 간장과 함께 비벼먹는다.      


영화 <스키야키>의 한 장면 (감독: 마에다 테츠)


그 순간 동료 수감자 한 명이 침을 꿀꺽 삼킨다. 1점 획득! 아마 영화를 본 일본 사람들 중 대다수가 이 장면에서 같이 침을 삼켰겠지만 내 마음은 전혀 동하지 않았다. 한국 사람이기 때문일까.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먹는 장면을 봤다. 으아, 저게 맛있을까? 날계란에 비빈 밥이 인생 최고의 소울푸드라니. 영화 <록키>에서 실베스타 스텔론이 날계란 다섯 개를 컵에 넣고 마시는 걸 보긴 했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충격이었다. 그건 록키 개인의 특이한 식성일 뿐이지 미국인의 식문화는 아니니까.      


그럼에도 그 메뉴에 도전해 본 건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그저 늦은 밤에 집에 와 달그락거리며 저녁을 먹기가 싫어서였다. 먹고 나서 뒤처리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함께. 맛은 보장할 수 없으나 일본에서 다마고카케고항(玉子かけご飯)이라고 부르는 날계란 비빔밥의 장점이 그렇게 나를 유혹했다. 가스레인지를 켤 필요조차 없다. 그저 밥그릇 하나만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맛은? 정 못 먹겠으면 전자레인지에 넣고 계란이 익을 때까지 돌려버리지 뭐. 밑져봤자 평소에 내가 해먹던 간장계란비빔밥이다.      


그렇게 용기를 내 뜨거운 밥 위에 버터를 올린 뒤 간장을 뿌리고 날계란을 얹었다. 젓가락으로 노른자를 터뜨려 뜨거운 밥에 비비자 그 열기에 서서히 계란이 익어갔다. 아하, 정확히 말하면 반숙인 계란 비빔밥이구나! 덩어리가 지지 않은 상태에서 밥을 비비면 뒤늦게 익은 계란이 밥알을 부드럽게 감쌀 터였다. 실제로 그랬다. 적당한 버터 향에 간장으로 간을 맞춘 밥. 그 위를 반숙으로 익어간 계란이 부드럽게 감쌌다. 무심코 간장을 많이 넣어 걱정했지만 천천히 익은 날계란은 간장의 날카로운 짠맛까지 품었다.     


그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게 왜 누군가의 소울푸드가 될 수 있는지. 왜 슌스케의 어머니가 밥상에 날계란을 한가득 올려줬는지. 매운맛도, 짠맛도, 그 어떤 모난 맛도 계란이 감싸면 좀 더 편안하게 다가온다. 무엇을 해먹든 계란을 풀면 좀 괜찮아진다. 그래 괜찮다. 다 괜찮다.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나 또한 다마고카케고항을 먹어봤으니 이렇게 말해도 괜찮겠지. 괜찮다. 다 괜찮다. 밥에다 계란을 풀어먹으면 다 괜찮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