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는 장판이 깔린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노트북 테이블을 장만한 이후로는 화장실에 가는 것 말고는 아예 침대에서 모든 걸 해결한다. 침대에 누워서 간식도 먹고 노트북도 쓸 수 있다. 혼자 있을 방이 있고, 머리맡엔 귤이 잔뜩 쌓여있고, 따뜻한 온수매트가 있다. 그렇게 웅크린 채 노트북을 하면서 귤을 까먹는다. 웹서핑을 하다 SNS에 올라온 지인들의 사진을 본다. 다들 남은 연차휴가를 쓰느라 바쁜지 유독 더운 나라에서 찍은 사진들이 올라온다. 부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엔 지금 내가 찾고 있는 모든 게 다 있으니까.
그렇게 웅크린 채로 오랜 시간 있다 보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사치라고 느끼곤 한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내 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동안은 좁은 연립주택에 네 식구가 부대끼며 살았었다. 방 하나를 동생과 같이 쓰며 충돌이 잦아지자 어느 날 아버지가 거실 한편을 뜯어 침대를 들여놓았다. 그래 봐야 문도 칸막이도 없어 방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새로 산 책이나 음반을 둘 곳도 없었고, 밤에 자주 깨는 식구들 때문에 불을 끄고 조용히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사람은 저마다의 영역이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그 영역을 세계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다는 걸 대학시절 국어교육과 교양수업 때 처음 배웠다. 그때 수업을 담당했던 교수님은 자신의 기쁨과 상처가 들어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세계라고 설명했다. 그건 지리상의 개념이 아니라 나의 삶을 오롯이 압축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뜻했다. 몇 년 치의 일기장도, 이제까지 모아 놓은 엽서가 들어있는 상자도 모두 자신의 세계라고 그는 말했다. 세계라는 말이 꼭 거대한 크기의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세계라는 말을 알게 된 무렵 처음으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7평짜리 원룸이었다. 이따금 술을 마시다 차가 끊겨 돌아가지 못한 친구들이 자러 왔던 걸 빼면 늘 혼자였던 공간이었다. 그 방에서 나는 더 좋은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의 근황을 들으면서 미래를 걱정하기도 했고, 고백에 실패하고 나서 스스로의 어설픔을 자책하며 이불을 걷어차기도 했었다. 앞에선 친절하지만 뒤로는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는 선배의 정체를 알고 그를 저주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이불속에서 한껏 웅크린 채 내가 가진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 풀었다. 다음 날 보고 찢어버릴 메모를 남기거나 이불속에서 부질없는 가정들을 상상하며 밤을 보냈다. 그때만큼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지를 천천히 늘어놓을 수 있었다. 수업에서 배운 대로 이곳은 나의 세계였다.
그렇게 문학적 의미의 세계를 경험하고 난 뒤 일상에서 생긴 변화가 있는데, 바로 지리적 의미를 뜻하는 '세계'에 피로를 느낀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붙은 대학 광고나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훈화 같은 것들. 세계로 뻗어 나가자. 글로벌 스탠더드. 호연지기를 가져라.
그런 말들을 들을수록 이불속으로 파고들어 나오지 않을 겨울밤을 생각한다. 따뜻한 장판, 그리고 OTT서비스와 귤만 있다면 바로 알 수 있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선 굳이 거대한 세계가 필요 없음을. 그 완벽한 세계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