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제이미 올리버의 유튜브를 뒤적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식 스크램블 요리법을 알려주는 동영상을 찾았다. 먼저 영국식. 냄비에 버터 한 덩이를 넣고 계란 네 개를 풀어 냄비에 넣고 약불에 젓는다. 프랑스식은 냄비에 뜨거운 물을 넣고 그 위에 계란을 푼 그릇을 올려 중탕한다. 보나 마나 오밤 중에 해 먹을 텐데 중탕이라니 패스! 남은 건 미국식인데, 프라이팬을 쓴다는 것 말고는 영국식과 전혀 다른 게 없었다.
그렇다면 한국식도 있을까? 동영상을 보다 추천수가 제일 많이 달린 댓글이 눈에 띄었다. 날카로운 나머지 뼈를 때리는 문장이었다.
“한국식: 스크램블을 시도한다-망한다-밥에 넣고 비빈다-완성”
그간 살면서 수 없이 한국식을 먹어온 터라 이번에는 영국식에 도전했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한 덩이 넣고 계란 두 개를 풀어 약불에 저었다. 분명 약불인데 계란 물을 가장자리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바삭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이건 필시 프라이팬에 계란이 눌어붙기 시작했다는 징조. 아무 생각 없이 손에 잡히는 프라이팬을 쓴 게 문제였다. 아예 불을 껐지만 계란이 들러붙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단 몇 초 사이에 모든 게 망했다. 당이 떨어져 예민해진 탓인지 "아 미친!"이라는 소리가 무의식적으로 나왔다. 어떻게든 살려볼 순 없을까 싶어 정신없이 저었지만, 이미 계란의 겉면은 바삭하게 익어 있었다. 결국 또 먹어야만 하는 한국식 스크램블. 다 만든 계란을 빵 대신 밥에 올려 간장을 뿌렸다.
스크램블은 오직 계란이 익는 정도를 조절해 만드는 요리다. 초 단위로 익는 정도가 달라지므로 잠깐 정신을 놓는 순간 요리는 망한다(사실 온 정신을 집중해도 망할 때가 부지기수다). 때문에 먹기 좋은 상태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다 적절한 순간에 포착하는 게 중요하다. 때를 놓쳐 더 익히면 수분이 날아가 맛이 떨어진다. 단 몇 초만 지나도 원하는 질감의 결과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스크램블 요리는 꽤 잔인한 구석이 있다. '아, 망했다!' 싶은 순간 모든 게 끝나니까. 오버쿡된 계란에 반숙의 촉촉함을 다시 불어넣는 건 불가능하다. 남은 선택지는 케첩에 찍어먹거나 밥에 비벼 먹는 것뿐.
동시에 스크램블의 잔인함은 바로 몇 초 전의 과거를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망한 계란은 망한 계란일 뿐이다. 그 계란에는 단 1%의 희망도 남아있지 않다. 희망은 오직 새 계란에만 있다. 눌어붙은 프라이팬 앞에서 희망과 미련은 아주 깔끔하게 구분된다.
언젠가 실패의 언저리에서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잡고 버둥거리던 때가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누군가 나의 노력을 알아주진 않을까?” “이번엔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거야” 하며 부질없는 노력을 계속했던 나날들. 어쩌면 가느다란 희망을 붙잡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이제까지 내가 쏟은 노력이 아까워 놓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희망과 미련은 그 애매한 경계만큼이나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어떤 게 희망이고 미련인지 판단하기 어렵다면 일단 프라이팬을 꺼내자. 그리고 일단 계란을 깨서 버터와 함께 휘저어 보자. 성공인가 실패인가. 밥에 비벼 먹어야 하는가. 새 계란을 깨야 하는가. 그 순간 모든 게 명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