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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어떻게 걸을까?

제주올레 - 떠날 결심, 기간과 시작점 정하기

by WonChu Mar 19. 2025

떠나야 할 때


There's no place to run and no gasoline

달려갈 곳도 연료도 없어

Engine won't turn and the train won't leave

엔진은 돌아가지 않고 기차는 멈추었어...
We'll do whatever just to stay alive

우린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야...


- 호세 곤잘레스의 'Stay alive'  가사에서


때는 작년 12월 중순, 일 년 내내 매달렸던 대본 작업을 중도에 그만두었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일순 막막한 진공 상태가 되어 버린 하루하루.     

멍하니 연말 연초를 죽은 듯 보냈다.

뇌리 구석구석에 절어 있는 과거의 세계를 떼어내려 헛심을 쓰며...


떠나야 할 때였다.

작업을 끝내면 가고 싶었던 곳들이 있었다.

히말라야 라운딩, 그리스비극의 현장들.

혹은 라오스와 베트남 사이의 호치민 루트…

그러나 원대한 여정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용기와 의욕이 끓어 오르지 않았다.

나는 왜 떠나야 함을 알면서도 떠나지 못하는가?   

 


틈틈히 걸어온 DMZ 평화의 길 화천구간을 이어 걸어볼까 했으나  

그마저도 날씨 탓, 시국 탓으로 출입통제 중...

불쑥 제주올레가 떠올랐다.

섬을 한 바퀴 돌아 원을 그리는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

바다를 보며 무한정 걷고 나면 마음의 힘이 다시 생겨날지도...    

그제야 떠날 마음이 먹어졌다.     



최소한의 계획


무작정 걷는 일에도 최소한의 계획은 필요했다.

며칠 간 다녀올지, 당장 어디로 갈지는 정해야 하니까.

기간을 정하기 위해 거리를 찾아보니  

제주올레는 27개 코스에 437km.

국토 횡단이나 종단에 육박하는 거리라니...

섬 한 바퀴 쉽게 생각했다가 깜짝 놀랐다.    

21개의 해안 길에 내륙과 부속도서의 6개 추가코스의 구성.  

굳이 완주를 하지 않고 해안을 따라 한 바퀴를 도는 21개 코스만 걸어도 원을 그릴 수 있을 것이었다.  

올레수첩에 첫 도장을 찍자마자 바로 완주에 집착하게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원을 그리는 것이 중요했다.

뭐가 됐든 빨리 한 가지 일을 끝내고 싶은 심정.  

  

한 코스의 거리가 대략 19km 내외니까

하루에 한 코스 반 씩, 매일 30km를 걸으면

2주 만에 한 바퀴를 돌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장기도보여행이 처음이긴 하나 그 정도면 할 만 할 것 같았다.



한 코스 20km의 과학


결말부터 말하자면 나는 원을 그리지 못했다.

9일 간 12개 코스, 제주도를 반 바퀴 도는... 1차 원정으로 여정을 끝냈다.         

이래저래 실패의 향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첫 번째 실수는 과도한 자신감이었다.     

걷기에 꽤 단련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매일 30km를 걷는 것은 육체적으로 무리였다.   

하루 이틀 사흘...은 괜찮았으나, 결국 9일째 인대가 부어올랐다.



도보길 한 코스가 대개 20km 내외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장기간 매일 걸으려면 하루 한 코스를 걷는 것이 적당하고,   

그럴 경우 제주올레 한 바퀴는 3주(21구간),

완주는 한 달(27구간)을 계획했어야 했다.

2차 원정은 최소 15일은 잡는 게 맞을 것이고.



육체적인 무리에 더해 하루 한 구간을 걸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제주올레 한 구간은 해안길, 흙길, 오름, 숲길, 마을길의 조합으로 설계되어 있다.

매 구간 비슷한 풍경의 반복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걸어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마을마다 바다, 공기, 역사가 모두 달랐고,

그 미묘한 변화와 차이를 느끼고 알아가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런데 하루에 한 코스 반을 계속 걷고 보니

각 구간의 개성이 겹쳐져 감흥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고,

일주일을 넘기면서 감정과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은 채 흘러 넘쳐 버렸다.

그렇게 무감 무심하게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순간,

이번 여행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는 종소리가 울렸다.  

 

감흥 없는 육체적 학대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 한 구간(20km)을 걷고, 그날의 감흥을 그날의 언어로 정리해야함을 뼈져리게 느꼈다.

     


1코스가 1코스인 이유


다음은 시작점을 정하는 문제. 구불구불한 타원의 섬길을 어디서 걷기 시작해야 할까?

대개 시작점으로 삼는 지점은 두 군데.     


첫 번째는 순서대로 1코스(동쪽 끝 성산 구간)부터 시작하는 방법이 있었다.

제주공항에서 버스로 1코스 출발지인 시흥 말미오름 입구까지는 약 2시간.

어차피 한 바퀴를 돌 텐데 굳이 그 먼 곳을 찾아가서 시작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름대로 다른 시작점을 찾아 출발했으나...

올레길 설계자들이 이곳을 1코스로 정한 이유를 중간에 그곳을 지나가며 알았다.

1코스 말미오름 정상에서 일출봉과 제주도 내륙의 멋진 전망을 보며 올레길을 시작해,  

섬을 한 바퀴 돌고나서 21코스의 지미봉 정상에서 다시 멋진 전망을 보며 대장정을 마무리 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던 것.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섬길 트레일의 장점을 잘 살린 설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올레 스테이


두 번째 시작점으로 삼기 좋은 곳은 제주 남쪽의 중심 서귀포에 있는 제주올레여행자센터 (7코스 시작점).

사단법인 제주올레에서 운영하는 메인 안내센터이자 게스트하우스로 이곳도 공항에서 버스로 대략 두 시간이 걸린다.

비용, 서비스, 정보 등등 올레도보여행자에게 최적화된 베이스캠프.

이곳에 짐을 두고, 무료셔틀이나 201번 버스를 이용해 4코스나 5코스부터 8코스나 9코스까지

가벼운 몸으로 쉽고 편하게 올레길을 시작할 수 있다.   

저렴하고 쾌적한 숙소, 올레길에 대한 각종 정보와 안내, 올레꾼들과의 동지적 교감,

서귀포 시내의 편의시설, 가장 예쁘고 따뜻하고 편안한 6,7,8코스의 해안길...

올레길을 처음 시작하기에 딱 좋은 선택이다.

단, 다른 도보여행자나 관광지를 피해 혼자 조용히 걷고 싶은 여행자라면 이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을 수도.     



제 3의 시작점


나의 경우는 나름의 이유로 제3의 지점을 시작점으로 정했다.

제주올레를 걷기 전 4.3평화공원을 참배하고 싶었기 때문.

제주에 올 때마다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가지 못한 미안함에 더해, 장도에 오르기 전 원혼들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공원과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18코스.

평화공원서 버스로 40분만에 제주시 동문시장 근처 김만덕기념관 내 안내센터에 도착,

그곳에서 제주올레패스포드(스탬프수첩)과 기념품으로 모자를 구입했다.

(가까운 곳에 관덕정분식 안내센터도 18코스 출발지라고)

시작과 끝을 자축할 장대한 풍경은 없지만,

공항에서 30분 만에 바로 올레길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어차피 어디서 시작을 하든 원을 그리고 돌아 올 수 있는 제주올레.

각자의 상황과 취향에 따라 가까운 14개 공식안내소 어디서든지 기념품을 구입하고, 상주하는 봉사자 분에게 친절한 안내를 받아 시작을 하면 된다.

시작과 끝의 멋진 전망이 아쉽다면 한라산 등반으로 마무리를 하면 될 일.

          


4.3 평화공원


2주 한 바퀴, 시작점은 4.3 평화공원.

최소한의 계획으로 새벽비행기에 올랐다.  

제주에 도착하니 아침 9시, 구름이 잔뜩 끼었다.

제주공항에서 번호마저 43-1번인 시내 버스를 타고

엊그제 내린 눈으로 겨우 입산금지가 풀린 산간도로 끝자락에서 내렸다.



차갑고 고요한 눈의 바다.

무겁고 두꺼운 구름의 장막.

서늘한 한기에 어깨가 바짝 움츠러 들었다.

제 발로 찾아 왔지만 끌려 온 듯 무거운 걸음 걸음.


내가 선택한 시작점이 이토록 숙연한 곳일 줄이야.  

역사의 비극을 안일하게 대해 온 본심을 들켜버렸다.    

나는 과연 저 안에 있을 학살 당한 원혼들과의 대면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괴감과 두려움에 벌벌 떨며

이 땅의 어둡고 아픈 기억 속으로

한 발 한 발 걸어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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