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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Feb 21. 2019

이상한 나라의 오키나와

오키나와 역사 편

일본이 처음은 아니었다. 10년 전, 모 기업의 의뢰를 받아 취재차 동경에 일주일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열혈 반일청년이었던 나는 내내 ‘적진에 들어와 있다’는 감정에 휩싸여 돌아다녔고, 오직 프로그램 촬영만 했을 뿐 개인사진은 단 한 장도 찍지 않았더랬다.   

  

여러 이유와 사정에 의해 가족여행지로 오키나와가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을 때, 그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그때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하는 후회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적진에서도 뭔가 유익한 진실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 성숙한 여행자의 자세가 아니던가.      


일본, 그 야망과 망상의 근원     

   

여행을 앞두고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새삼 일본이라는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가 절묘해 보였다. 아시아와 태평양 사이를 긴 띠 모양의 섬으로 가로막고 있는 나라.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 보기위해 잠시 일본 땅에 서서 세계를 바라보았다.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지구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간단해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보면 앞 바다에 한국과 중국, 러시아가 있고, 뒤로는 태평양 바로 건너에 미국이 있다. 발끝에 동남아시아가 있고, 오스트레일리아도 건너 보인다. 일본이 고립된 섬나라라는 생각은 우리만의 착각. 바다만 건너면 못갈 곳이 없고, 그 바다는 온통 무방비로 열려 있었다. 주변국보다 월등한 군사력을 갖게 되었던 그 순간, 그들에게 이 세계가 얼마나 작고 만만하게 보였을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실제로 일본의 야욕은 대륙에서보다 바다에서 더 수월하고 활발하게 수행되었다. 그들은 순박한 원주민들이 모여 살던 태평양의 섬들을 손쉽게 점령하며 정복에 맛을 들였고, 그곳의 자원을 바탕으로 대제국을 꿈꾸었다. 아래 지도를 보면, 대륙은 그들이 건설하려 했던 제국의 일부였을 뿐, 그 시작과 끝에 바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미국을 하와이 밖으로 밀어내기만 했다면 태평양의 반 이상이 아직도 일본의 수중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 그들에게 진주만공습은 미친 짓이 아니라 제국의 완성을 위해 피할 수 없는 일전이었던 것이다.  


(좌) 일본이 식민지를 점령한 년도  (우) 식민지가 최대면적에 달했던 1942년의 판도

풍수지리는 과학이라 했던가. 그들의 자리는 길목에서 이간질하며 장난치기 딱 좋은 자리, 남몰래 야심과 망상을 키우기 딱 좋은 자리, 사고 치고 쌩까기 딱 좋은 자리로만 보였다. 뭐든 알면 알수록 정이 가는 법이거늘, 일본은 알수록 더 얄밉고 멀어지는 이상한 나라였고, 그곳의 작은 섬 오키나와로 향하는 나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 앉았다.    

  

이상한 나라의 오키나와    


오키나와의 첫인상은 왠지 나쁘지 않았고, 사람들 또한 호감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도 잠시, 여행을 하며 차차 알게 된 바로 오키나와는 현재 일본에 속해있지만 일본과는 완전히 다른 역사와 정서를 가진 곳이었다.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으나, 여러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일본의 일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니 다행이라고만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오키나와의 역사에 빠져버렸다. 중요한 국면마다 우리의 역사와 겹치는 것도 흥미로웠고,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일본의 민낯을 볼 수 있었기에 더 깊이 몰입되었다.              


지난 역사를 안다고 해서 아름다운 풍경 너머에 흐르는 ‘오키나와의 눈물’을 다 닦아 줄 수는 없겠지만, 나로서는 오키나와를 ‘일본의 오키나와’가 아닌 ‘오키나와의 오키나와’로 볼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소득이자 보람이기에... 그 오랜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려 한다.   

 

오키나와는 왜 일본이 되었는가? 

   

일본의 침략 이전까지 오키나와는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적인 섬나라였다. 오래 전부터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고, 홍길동이 율도국을 세우려 한 곳이 오키나와(한자로는 유구국)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을 정도로 우리와도 교류가 많았었다고. 그런데 어쩌다 오키나와가 일본의 일부가 되었을까? 일본과 오키나와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잔파 전망대의 '타이키' 동상. 호전적인 사무라이인 줄 알았지만, 이 분은 류큐왕국 최초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왕국의 기틀을 잡은 재상이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중국.

  

류큐 왕국은 1879년, 일본의 해양진출 초기에 완전복 당했다. 그곳이 인도차이나로 향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일제가 강점하기 40년 전으로, 일본의 야욕이 얼마나 일찍 발흥되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도 일본 대륙진출의 관문이었던 탓에 일찍, 오래 식민을 겪어야 했기에 깊은 공감대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이후 거대한 전쟁이 쉴틈없이 오키나와를 휩쓸고 지나갔다.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이라는 거대한 태풍이 그들의 운명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돌려 놓았던 것이다.  

   

태평양전쟁과 오키나와    


1940년대 태평양 전쟁 말기, 오키나와는 연합군과 일본군의 마지막 격전지였다. 오키나와와 이오지마를 넘으면 바로 일본본토였기에 일본군의 저항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고, 그에 따라 연합군은 예상 밖의 장기전을 치러야 했다.     


오키나와 상륙 당시, 연합군은 이미 남태평양에서 겪은 고전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수 만발의 폭격을 가해 군항이 있는 중남부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미 정면대결을 포기하고 산 속으로 들어간 상태. 이후 게릴라전에 돌입한 그들은 3개월을 넘게 버티며 인류역사상 최악의 만행을 자행하게 된다.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 당시 파괴된 슈리성

패색이 짙어진 일본군은 그들이 늘 그랬듯 투항 대신 자결을 택했다. 자결을 할 거면 자기들이나 하면 될 것을, 그들은 강제징집한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먼저 자결할 것을 강요했다. 원주민을 살려둘 경우 군사정보가 유출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들은 원주민들에게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미군에게 잡히면 어차피 죽는 것보다 더한 치욕과 모욕을 당하게 될 것이라 겁을 주었다. 그리고 차마 자결하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서로를 죽이도록 종용했다. 동굴 속에서 강요와 협박은 계속되었고, 원주민들은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형이 동생을 죽이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당시 전투와 자결로 희생당한 원주민이 10만 명에 달하고, 주민들이 만난 미군은 일본군의 얘기와는 달리 그리 야만적이지 않았기에 그들의 증오와 배신감은 더 컸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은 오키나와에는 당시 가족을 모두 죽이고 자결을 시도 했으나 불행하게도 살아남은 증언자들이 아직도 지옥 같은 여생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과 오키나와     


연합군은 오키나와 점령 직후 동경을 공습하는 한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해 전쟁을 끝냈다. 전후 일본은 전범국이 되어 미군정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때 일본인들은 전국민이 미군에 철저히 복종하여 전범국 중 예외적으로 미국의 호감과 신뢰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때마침 한국전쟁이 발발, 일본은 미국의 군수보급기지 역할을 하며 단번에 국력을 회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에게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로또였다. 그들은 한국전쟁 덕에 다른 전범국들이 겪었던 처벌을 면했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가장 확실한 미국의 우방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남북이 싸우면 미국이 일본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 또 미국에 고개를 숙이는 만큼 이웃나라들에게 영향력이 강해진다는 것. 한국전쟁으로 체득한 이 교훈은 일본의 변치 않는 생존전략이 되었다.   

    

1952년 2월. 도쿄 니콘 카메라공장의 렌즈 검사원 AP Photo/Bob Schutz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순식간에 국력을 회복했다.

한반도의 휴전이야말로 일본에겐 최상의 결말이었다. 휴전상태가 계속되는 한 미국은 일본을 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은 일본이 큰 반성 없이 국제사회에서 정상국가로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 지원했고, 일본은 그렇게 궁지에서 벗어나자마자 서서히 미군철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일본이 동경에 있던 미군전투사령부의 대체지로 제안한 곳이 바로 오키나와였다.  

   

당시 오키나와는 미군의 고등판무관 관할하의 자치령이었다. 전후 일본이 아닌 독립국으로 관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권리도 없는 일본이 황당한 제안을 한 셈인데, 불행하게도 이 제안은 한국전쟁 종식에 따른 미군의 동아시아 전략수정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미군은 1958년 오키나와로 전투사령부를 이동해 1972년까지 이곳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앞선 1957년 동경에 있던 유엔사령부는 우리나라의 용산으로 이전하여 현재는 비무장지대에 남아 정전협정을 관리감독하고 있다.  

     

베트남전과 오키나와   

 

미군의 새로운 군사전략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1962년 미군이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오키나와가 핵심적인 배후기지가 된 것이 그것이다. 오키나와는 미 해병대와 미 공군사령부의 주둔지이자, 심리전을 위한 전단제작과 살포, 방송 제작과 송출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번엔 미군을 지원하는데 총동원되었다.   

  

전쟁의 장기화와 전세의 악화에 따라 후방기지 오키나와에서는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주민을 상대로 한 미군의 범죄와 사건사고가 폭증했는데, 전시체제의 미군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았다. 미군의 범죄는 갈수록 일상화되고, 흉포해졌고, 오키나와 주민은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와 분노를 표출했다.

   

1970년 12월 20일. 반미시위가 끝난 후. COURTESY OF LARRY GRAY

 

그런데 미군철수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묘한 일이 벌어졌다. 일본에 편입되는 것이 미군철수를 관철시키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오키나와 주민들이 자진해서 일본편입을 공식요청하고 만 것이다.   

 

일본편입과 민족차별, 그리고 미군기지 이전    


1972년 베트남 전쟁에서 패한 미군은 미련 없이 오키나와에서 철수했다. 일본정부는 편입요청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오키나와는 다시 일본영토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남아 있게 된 길고긴 사연. 독립과 미군철수를 맞바꾼 그들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미군정의 횡포가 그만큼 컸고, 당시 국제정세상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때 조금 더 밀고나가 독립을 쟁취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미군철수도, 보호도 받지 못하고 이용만 당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정부는 일본 전체면적의 0.5%인 오키나와에 일본주둔 미군의 75%를 떠넘겨 놓고 있다. 일본정부는 미군을 주둔시켜주는 대가로 외교, 군사, 경제적 이익을 누리면서도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목구비가 뚜렷한 오키나와 인들을 미개인이라 부르며 차별해 왔다.     


미군범죄도 계속되었다. 1995년에는 미국 해병대와 해군 소속이었던 군인 3명이 12세의 오키나와 소녀를 납치해 집단 강간한 사건으로 온 주민이 목숨을 건 시위를 벌여야 했고, 얼마 전인 2016년에도 미국인 군무원에 의해 오키나와 여성이 끔찍하게 난자당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키나와 후텐마 미공군기지. 기지 바로 건너에 고속도로 휴게소 건물 옥상에 공군기지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최근의 소식을 통해 보건데 오키나와 주민들의 선택은 이제 분명해 보인다. 당장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는 없겠지만, 중앙정부로부터 최대한의 자치를 확보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가장 시급하고도 뜨거운 이슈는 기노완 시의 시내에 있는 후텐마 미 공군기지를 현 내의 다른 지역, 즉 헤노코 바다 매립지로 이전하는 문제이다.   

  

미군기지 이전은 1996년 미군철수 운동에 따라 일본정부와 미군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었다. 아베 총리가 주민들의 각종 민원에 시달리는 미군을 위해 거액의 건설비 지원을 약속하고 지난 10년 동안 강력하게 추진해 온 사업으로, 몇년 전 나고 시의 시장이 직권으로 중지시킨 헤코노 해안 매립공사를 최근 아베정부가 강제로 재개하면서 다시금 갈등이 촉발된 것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기지이전이 아닌 기지철수를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고, 자신들이 행사할 수 있는 모든 행정수단을 동원해 버텨왔다. 제주도만한 섬에서 미군과 일본정부를 상대로 싸워 온 그들의 유일한 무기는 주민의 단결. 자치권 수호의 최대 위기에 봉착한 그들은 다시 한 번 주민들의 목소리를 끌어 모으는 중이다. 작년 10월 새로 선출된 ‘타마키 데니’ 주지사가 미군기지 이전에 대한 전 주민의 찬반투표를 제안했고, 이에 따라 이번 주 일요일(2019년 2월 24일) 투표가 실시된다.      


투표결과와 이후의 상황을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주민들의 여론은 이전반대로 이미 기울어져 있고, 아베 총리는 투표결과와 상관없이 이 문제를 미국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줄 수 있는 소재로 계속 활용하려 할 것이기에... 공사재개와 중단이 지난하게 반복될 공산이 커 보인다. 한쪽은 필요할 때마다 돌을 던지고, 다른 한 쪽은 그때마다 목숨을 걸고 몸으로 그 돌을 받아낼 예정인 것이다.      


오키나와는 적진 속의 이웃, 전투 중인 휴양지. 그들이 이제 다시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고 있다는 소식에 한낫 여행자인 나의 마음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미군철수와 주권회복의 그날까지 이 전쟁을 계속 할 그들에게 이웃들의 관심과 응원보다 절실한 것은 없을 터. 나의 응원이 그들에게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며...

       

간바레 오키나와!  頑張れ 沖縄!


오키나와의 수호신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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