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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Mar 07. 2019

샹그리라는 있다

중국 운남성 편

"... 저쪽, 그곳은 시계들조차 행복을 울려준다." 

- 보들레르 <여행으로의 초대> 중에서 

   

여행을 하다보면 ‘이 순간을 위해 여기에 왔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다. 나는 2006년 중국 윈난성 샹그리라(구 중디엔 中甸)에서 그 순간을 처음 만났다. 그 순간으로 인해 나는 여행에 빠졌고, 그 순간을 주제로 생애 첫 장편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곳은 오지였다. 북경과 상해가 이제 막 돈맛을 알아갈 무렵, 그 이름조차 ‘구름의 남쪽’(윈난, 雲南)인 그곳은 중국인과 세계여행자의 히든플레이스였다.    


구름의 남쪽


북경에 머물다 지인이 보여준 한 장의 사진에 매혹되어 운남성으로 향했다. 설산 아래 드넓은 초원에서 말들이 풀을 뜯고 있는 풍경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중국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몸은 그곳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전혀 그곳을 예감할 수 없었다.   

  

10월 말, 운남성의 성도 쿤밍(昆明, 또 다른 이름은 춘성(春城))에는 골목 구석구석 봄꽃들이 피어있었다. 그곳은 여행자들의 도시였다. 게스트하우스는 동남아시아에서 넘어와 티베트나 인도로 넘어가는, 혹은 그 반대의 루트를 따라 동남아시아로 넘어가는 여행자들로 북적였다.     


2011 쿤밍. 세계여행자

내가 만난 세계여행자는 그 이름도 아득한 이동통신사 KTF의 지점장으로 명퇴를 한 형님이었는데, 가장 맘에 드는 곳에 게스트하우스를 차리기 위해 세계일주를 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꽤 연배가 높은 형님이었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니 지금의 나보다 몇 살 아래. 그는 라오스에서 넘어왔고, 이제 윈난을 지나 티베트와 히말라야를 거쳐 인도로 향할 예정이었다.  

   

5개 국어 사전은 진즉에 버려버리고 웬만한 문제는 한국말과 몸짓으로 다 해결해 버리는 그와 샹그리라까지 동행했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하는 날이 허다할 정도로 혼자 외로이 버텨 온 그는 우리를 만나자 한풀이하듯 여행과 인생에 대한 지난 이야기를 쏟아냈다. 


긴 동행 끝에 각자의 길로 떠나기 전날 밤, 그가 남긴 한 마디를 잊을 수 없다.   

“뭐야, 혼자 독하게 잘 다니던 사람 마음만 흐려 놓구. 이렇게 가면 나는 어떡해. ”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 2011년에도 같은 숙소에 묵었다. 이번엔 중국인들로 가득했다. 세계여행자보다는 흥미가 덜했지만 중국 현지인들과 나눈 그들의 고향과 생활이야기도 나름 유익하고 즐거웠다.   

     

버스와 기차, 풍경의 속도    


성도 쿤밍에서 출발해 군단위의 마을을 하나하나 거쳐 히말라야의 초입까지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인 윈난의 여행루트였다. 쿤밍, 따리(大理), 리장(丽江), 호도협(虎跳峡), 샹그리라(香格里拉)... 매번 대여섯 시간 씩 시외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험준한 산길을 따라 고도를 서서히 높여가며 시시각각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지금은 철도가 깔린지 오래지만 당시는 버스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오지의 현지인들과 몸을 맞대고 끼어 앉아 있자니 비로소 진짜여행을 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아찔한 산길 아래로 펼쳐진 대지와 장강의 풍광들, 버스정류장에 잠깐씩 내려 둘러본 척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시골풍경, 마구 뒤섞여 1박 2일간 버텨야 했던 침대버스... 고된 만큼 더 즐거운 여정이었다.  

 

2006 따리. 얼하이 호수 산책길에 우연히 만난 바이족의 결혼식

5년 뒤인 2011년, 열차를 타고 쿤밍에서 리장까지 이동해 본 바로 역시 윈난은 버스임을 절감했다. 안정적으로 흘러가는 낮은 풍경, 현지인들과 마주보고 길게 나누는 대화도 좋지만, 땅의 굴곡을 따라 깊은 곳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맛이 없다는 것은 적어도 윈난 여행에서는 치명적이라 할 만 했다.     


기차이동은 또 다른 아쉬움을 남겼다. 일정을 줄이기 위해 ‘따리’를 건너뛰고 ‘리장’으로 곧바로 간 것이 실수였다. 쿤밍 다음의 기착지인 따리는 험지를 각오하고 떠난 여행자들에게 풍요로움으로 허를 찌르는 동네. 울창한 '창산(苍山)'과 바다만큼이나 넓고 푸른 ‘얼하이(洱海)’, 그 사이 너른 들판에 사는 후덕한 소수민족 ‘바이족(白族)’의 나라 따리는 이 구역의 허파이자 샘터. 대도시에서 어지러울 정도로 관광지화 되어버린 리장으로 바로 들어가니 여행의 여유와 운치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2006 리장. 리장에 다시 간다면 이유는 하나, 설산이 보이는 객잔(전통가옥숙소).

리장 주변에 볼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곳은 2006년에도 충분히 상업화되어 있었고, 2011년에는 고성 주변부에 부지런히 ‘새로운 고성(?)’을 짓고 있었다. 그후 여러 번 방송까지 탔으니... 그곳의 변화한 모습을 내 눈으로는 직접 확인하고 싶지 않다.       


샹그리라를 향하여    


리장에서 벗어나자 고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깊이가 천 미터에 달하는 협곡인 호도협이 샹그리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여기서부터는 티베트 민족인 장족의 구역이라 중국이 아닌 히말라야 권역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샹그리라'하면 대단히 유서 깊은 말 같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미국작가 ‘제임스 힐턴’이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1933)>에서 만들어낸 말로 우리말로는 ‘이상향’. 소설 속 그곳은 ‘깊은 협곡에 너머 히말라야 산중에 평균수명 300살의 도인들이 모여 평생 싸우지 않고 경우 바르게 사는 신비한 동네’로 묘사되어 있었다. 티베트 불교와 히말라야에 대한 환상으로 빚어낸 이상사회.   


2006 호도협

훗날 중국정부는 관광산업을 위해 소설의 조건(히말라야 + 티베트불교 + 초원 + 협곡)과 가장 흡사한 곳을 조사, 2001년 중디엔을 샹그리라로 공인하고 개칭했다. 과연 중국다운 황당하면서도 과감한 결정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그 이름에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긴 했다. 그곳에 가기까지 샹그리라라는 이름은 우리의 가장 큰 관심거리이자 안주거리가 되었다. 맘에 들지 않으면 ‘샹그리라가 뭐 이래?’, 뭐든 맘에 들면 ‘샹그리라가 따로 있나?’ 농담을 주고받으며 히말라야를 향해 꾸역꾸역 다가갔고, 그러면서 암암리에 각자의 샹그리라를 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고원의 종소리    


열흘 남짓의 나름 험난한 여정 끝에 샹그리라에 도착했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리장에서 돌아갔다. 우리로서는 나름 험난한 과정을 거쳐 다다른 세상 끝이었지만,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히말라야의 입구이자 차마고도의 시작점에 불과한 곳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휴식처. 그래서 원래 이름이 중디엔(中甸)이었다. 현지주민들은 ‘샹그리라’라는 지명이 어색한지, 아니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여전히 그곳을 중디엔이라 부르고 있었다.  

 

2006 터미널 앞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샹그리라의 돼지들

  

샹그리라에서 나를 가장 먼저 맞은 것은 숙소나 택시의 호객꾼이 아니라, 터미널에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소와 돼지들이었다. 여기가 진짜 샹그리라인가? 숙소를 찾아다니는 동안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사원을 이고 있는 작고 조용한 마을에 오래된 사람들이 묵묵히 자기네 방식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무심함이 좋았다. 티베트의 소수민족인 장족은 승려가 아닌 사람에게도 승려와 같은 겸허함과 경건함이 있었다. 객잔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그랬다.

     

다음날 아침. 체온으로 데워 놓은 담요에서 빠져나와 창문을 열었다. 하늘이 낮고 육중하게 방 천장처럼 내려 앉아 있었고, 고원의 평지가 두 손을 넓게 펼쳐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히말라야의 공기는 차갑고 성겼다. 고도 3,300미터의 희박한 공기를 길게 빨아들여 가슴을 채웠다. 그 순간 몸에서 무언가 뭉텅 빠져 나갔고, 그 빈자리에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2006 샹그리라. 티베트 사원 송찬림사(쏭찬린스). 티베트인은 승려가 아닌 사람도 승려만큼이나 경건하다. 


그곳에 머무른 2박3일 내내 느꼈던 충만감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세상의 어깨 위에 올라타 하늘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 서서 풍경을 내려다 볼 때마다 ‘이 세상에 내가 있다. 내가 있어도 된다.’는 뿌듯한 자좀감이 치솟았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카렌 블릭센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다'라고 한 그 느낌, 목숨을 걸고 고산에 오르는 등반가들이 잊지 못하는 고원의 그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흘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자석이 깔려 있는 듯 발이 쩍쩍 달라붙었다. 하늘의 무게, 땅의 힘에 눌려 자주 주저앉았다. 풍경은 어질한가하면 또렷하고, 마음은 비었는가하면 넉넉했다.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더 이상 나아갈 필요 없다. 다시 돌아갈 필요도 없다.’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 부름의 소리를 뿌리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곳을 떠나오기 위해 실로 온 힘과 용기를 끌어 모아야 했다. 일행들, 비행기티켓, 나를 기다고 있는 일상과 가족들...을 무시할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간신히 침대버스에 올라타 몸을 뉘였다. 그러자 달리는 버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마음이 식기 시작했다. 마치 샹그리라를 떠나자마자 급속하게 늙어버린 소설 속 티베트 공주처럼, 부풀었던 나의 심장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나의 지평선은 사라졌다.    


지금도 가끔 '그때 그곳에 조금 더 머물러야 했을까?'하고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그러면 언제나 같은 대답이 들려온다. '그랬어야 했다!' 라고.


2006 샹그리라. 초원 너머의 송찬림사

샹그리라는 있다    


실로 오랜만에 그곳, 그 여행을 떠올렸다. 최근 소식에 따르면 중국정부가 중디엔에 샹그리라라는 이름을 붙인 뒤 7만 명이었던 관광객이 700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급기야 2014년에는 고성지구에 전기누전으로 인한 대화재가 발생하여 문화재급 가옥들이 대거 전소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보도사진 속에서 내가 묵고, 걷고, 자주 주저앉았던 그 길이 불타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에 대한 걱정보다 화염 속 검은 형체의 건물들이 너무 크고 많은 것에 먼저 신경을 쏟고 있는 내가 미웠다. 대화재 이후 5년이 흘렀으니 지금은 상당히 복구가 되었테지만, 그렇더라도 그곳은 더 이상 나의 샹그리라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그 여행체험을 바탕으로 첫 시나리오를 썼더랬다. 일명 코믹청춘어드벤처로드무비. 그 시나리오를 쓰며 온갖 여행기를 읽었고, 시나리오를 한 번 수정할 때마다 상상으로 그곳을 다시 다녀왔다. 3년 동안 9고까지 쓰다지쳐 나는 그 프로젝트를 접었다.      


나의 시나리오는 결국 영화화 되지 못했다. 

그 사이 샹그리라는 더 깊은 곳으로 숨어 버렸다.

샹그리라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마음 속에 있다는 말은 허망하다.

다만 어딘가 샹그리라가 있으리라 믿을 때 나는 더 행복하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나는 계속 시나리오를 쓴다.   


2006 샹그리라. 지금은 불에 타 사라졌을 그 길. 그 샹그리라.

   

P.S 

세계여행자 형님은 그후 히말라야 라운딩을 완주했다며 쏘롱라 고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다음 소식은 인도 첸나이에서 왔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다.

그가 무사히 세계일주를 마쳤을까? 맘에 드는 곳을 찾아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있을까?  

그럴 것이라 믿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를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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