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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Mar 14. 2019

영혼의 노래 '칸테 혼도'

스페인 안달루시아 편

첫 번째 유럽    


내 여행의 시작, 어쩌면 내 여행의 끝이 될 그곳 스페인. 2005년 영화촬영을 위해 45일 간 그곳에 머물렀다. 내 생애 가장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곳에 있는 내내 황홀함과 위기감이 교차했다.


처음 만난 유럽은 화사하면서도 도도했다. 보고 있지만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느끼고 있지만 그 느낌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정작 봐야 할 것들을 무수히 지나치고 있다는 생각에 짓눌렸다. 간단히 말해 무식이 탄로난 기분. 


그것으로 여행과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고민의 시작되었고,

나는 그렇게 여행에 걸려들었다.  

   

2005 세비야. 이슬람 사원 지붕 너머로 보이는 이슬람 양식의 카테드랄(성당)


스페인을 오랫동안 되돌아보며 천천히 깨달은 것은 내가 본 모든 것에 슬픔과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다는 것이었다. 거대한가 하면 음침하기만 한 성당들, 버려진 듯 황량한 들판, 동물학살이 되어 버린 투우, 프라도 미술관에 걸린 고야의 어두운 그림들, 초라한 공연장에서 몸부림치는 무희와 악사들, 무사태평 유쾌하게 떠들다가 잠시의 침묵에 한없이 막막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     


그때의 나는 그 어둠에 무심했고, 그래서 그때마다 문 밖으로 쫓겨나는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이제 어둠을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음을 아는 나이가 되었지만... 타인의 어둠을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그들이 바라보는 어둠과 내가 바라보는 어둠이 같을 수 없음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칸테 혼도(Cante Jondo)’와의 만남    


마드리드에서 한 번, 세비야에서 한 번 플라멩코 공연을 보았다. 마드리드의 플라멩코는 젊고 흥겨웠고, 세비야의 플라멩코는 소박하고 원숙했다. 무용보다 음악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무희들의 강렬한 눈빛과 몸부림보다 가장자리에 있는 악사들의 노래에 더 마음이 갔다.

    

스페니쉬 기타, 아랍의 향취가 짙은 창법. 넋두리와 흐느낌, 절규와 통곡을 끝없이 오가는 선율. 도저히 춤과는 어울릴 수 없는 음악을 터질 듯 한 긴장으로 받아내고 있는 무희들. 춤은 커녕 듣고만 있어도 기가 다 빠져나가는 그 노래. 바로 ‘칸테 혼도(Cante Jondo)’였다. 도대체 저 음악은 어디서 왔을까?  

   

2005 세비야. 플라멩코 공연장 '로스가요스'에서

‘칸테 혼도’는 플라멩코 음악의 일종이다. 칸테(Cante)는 노래(song), 혼도(Jondo)는 깊다(deep), 즉 '깊은 노래‘, 혹은 ‘심각한 노래'라는 의미. 플라멩코 음악 중 가장 어둡고 슬픈 노래이다. 나는 칸테 혼도를 통해서 스페인의 어둠을, 어둠의 심연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으로 나를 안내한 것은 스페인의 천재시인이자 국민시인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1899-1936)’였다.    


오, 기타여!

다섯 개의 칼날에

찢어진 가슴이여.


- 로르카의 <안달루시아 노래 칸테 혼도의 시> 중 ‘기타’에서    


이주민의 땅, 안달루시아  

   

유럽의 끝이자 지중해의 끝 스페인. 요즘에야 대제국의 유산과 광활한 자연이 빛을 발하는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지만, 오래 전 피레네산맥 너머는 척박하고 황량한 변방일 뿐이었다. 그곳은 유럽에 정착하지 못한 여러 민족들이 마지막으로 정착하는 곳이었고, 그중에서도 남쪽 끝, 북아프리카와 마주한 안달루시아 지역은 이주민들의 종착지이자 교차로였다.  

   

어둡고 맑은 하늘.

바싹 탄 땅

그 밑으로 아주 천천히 흐르는

물줄기,

서반아...


- 로르카의 <안달루시아의 노래 칸테 혼도의 시>중 ‘사에타의 노래’에서   


2005 론다. 아름답지만 누군가에게는 가혹하고 멀게만 느껴졌을 그 길.

스페인 최초의 정착민이라 할 서고트 족의 발원지는 스칸디나비아였고, 아랍인들은 중동에서 출발해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곳에 와 왕국을 건설했다. 그들과 함께 아랍계 북아프리카인인 무어인도 건너왔다. 또 동부 게르만족의 일파 반달족은 로마시대 이곳에 정착해 안달루시아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유랑민의 끝판왕은 집시였다. 인도에서 출발한 그들은 동유럽,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내몰리고 내몰린 끝에 유럽의 가장 구석진 이곳 안달루시아에 둥지를 틀었다.    

 

과달키비르 강은

진홍색 수염이 있다.

그라나다의 두 강물은

하나는 통곡, 또 하나는 피.

   

- 로르카의 <안달루시아 노래 칸테 혼도의 시> 중 ‘안달루시아 세 강의 작은 발라드’에서


안달루시아는 700년 동안 계속 된 ‘레콘키스타(가톨릭 왕국의 이슬람 축출 전쟁)’가 끝날 때까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또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공화주의자들의 주요거점이기도 했다. 그 바람에 가톨릭과 파시트스 양편 모두로부터 기나긴 세월 차별과 보복을 당했고, 집시는 이 차별받는 고장에서 재차 배척을 받는 가장 밑바닥의 유랑민이었다.    


밑바닥에서 피어난 스페인의 꽃, 플라멩코    


안달루시아에 도착한 집시들이 처음 둥지를 튼 곳은 동굴이었다. 주민들의 눈을 피해 무리를 지어 생활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마치 일벌처럼, 낮에는 마을로 나가 점술, 공연, 가축중개, 냄비땜질, 그리고 소매치기 등으로 돈을 벌었고, 밤이 되면 동굴에 모여 잠을 잤다.     


2005 세비야. 동굴 모양의 플라멩코 공연장

가족단위로 옮겨 다니며 살아 온 그들은 자신들만의 규율에 따랐다. 가족의 규율은 국법보다 엄했다. 마을에서의 그들은 무법자였고, 그래서 죽는다 한들 그들을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슴에 칼을 맞고

길거리에 죽어 있었어요.

아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가로등만 얼마나 떨고 있던지요!


- 로르카의 <안달루시아 노래 칸테 혼도의 시> 중 ‘경악’에서    


플라맹고는 집시들의 유일한 제의이자 축제였다. 발구르는 소리와 손뼉 소리가 동굴을 타고 크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집시의 언어인 ‘칼로(calo)’로 노래를 부르며, 활기차고 관능적인 춤을 추었다. 그 노래에는 그들이 걸어 온 고난과 수난의 여정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한 맺힌 가사, 인도와 아랍의 창법, 이탈리아의 발성, 그리고 스페니쉬 기타와 캐스터네츠...     


이탈리아인 절반

플라멩코 집시 절반,

저 유명한 실베리오 노래는

어떠했을까?    


- 로르카의 <안달루시아 노래 칸테 혼도의 시> 중 ‘플라멩코 삽화들’에서

2005 세비야. '사람이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한이 스스로 노래는 듯...' - 로르카의 '프랑코 말라게냐 소리꾼 후안 브레바' 중

집시들은 애환과 슬픔을 꾸밈없고 간결한 가사로 표현했다. 짧은 가사를 반복하면서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변주를 했다. 그러다 참을 수 없이 감정이 격해지면 ‘아이! 아이!’ 하는 비명 같은 추임새를 넣었고, 노래는 절규와 통곡으로 치달았다. 그 슬픔의 절정, 비극적 카타르시스의 감정을 그들은 ‘두엔데(Duende, 한)라고 불렀다. 

   

아이 야야야야이,

까만 망토를 걸친 그 여자!


- 로르카 <안달루시아의 노래 칸테 혼도의 시> 중 ‘솔레아의 노래’에서   


집시를 혐오하는 마을사람들 또한 이주민의 후손이요, 차별의 피해자요, 정열의 화신이긴 마찬가지... 플라멩코는 인기 있는 공연이 되었고, 그렇게 안달루시아의 영혼이 되었다. 칸테혼도는 그 영혼의 정수였다.   


로르카, 시인의 죽음


그라나다에서 태어난 로르카는 먼 곳에서 온, 이 어두운 노래에서 자신의 영혼을 보았다. 그는 집시들의 언어로 된 노래를 열정적으로 받아썼고, 그 어둠의 정서를 스페인어로 건져 올렸다. 그러자 온 하늘이 검은 언어로 물들었고, 안달루시아의 사람들은 그와 사랑에 빠졌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1927)

짧은 생애동안 수많은 시를 써낸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스페인 내전 중 프랑코 파 파시스트 민병대에 의해 그라나다의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총살당했다. 로르카를 체포한 ‘라몬 루이스 알론소’는 그가 “다른 사람들이 국민 진영에 총으로 입힌 피해보다 더 많은 피해를 펜으로 입혔다.”고 말했고, 로르카에게 직접 총을 쏜 ‘트레스카스트로’는 “우리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죽였다. 나는 그가 동성애자임을 고려하여 그의 항문에다 총알 두 방을 쑤셔 박았다.”고 공언했다.


광신도들이 쓸고 지나간 자리, 안달루시아에는 시인의 무덤과 수많은 미망인들과 집시의 통곡만이 남았다.  

 

죽음이 우리를 데려 갈 때

그 눈은 녹을까? 아니면

그 뒤 다른 눈이 올까? 그리고

더욱 완벽한 장미들도 피고?


- 로르카의 <시모음> 중 ‘가을 노래’에서

2005 안달루시아. 시인도, 집시도, 광신도들도 지나 갔을 눈부신 안달루시아의 들판

스페인에 취한 작가들의 여행기를 꽤 많이 읽었지만, 로르카와 칸테 혼도를 알고 나서야 그곳의 슬픔과 어둠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고, 그러자 다른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 


그후 그 어둠은 바람처럼 나의 여행을 따라다녔다.   

각기 다른 풍경에 물든 같은 빛깔의 어둠을 보았다.  

아이! 아이!

어둠 속에서 이름 없는 별들의 노래를 들었다.


너는 너의 손금에 있는

그 오솔길을 따라가,

나는 못질에 멍든

구멍들이 많으니...


- 로르카 <안달루시아의 노래 칸테 혼도의 시> 중 '만남'에서 


* 인용문 출처 -  <로르카 시 선집> 2008. 을유문화사. 지은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옮긴이 민용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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