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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Mar 21. 2019

지리산을 걷는 사람들

지리산 종주 편

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는다. 모두들 잠시나마 혼자이고 싶은 마음으로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삼사일 같은 길을 가면서 계속 마주치다보면 “지리산에는 왜 오시게 되었나요?”라는 뜬금없고 광범위한 질문 없이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힘겨운 오르막길에서, 전망 좋은 봉우리 위에서, 취사장에서, 잠자리에서 한 두 마디의 인사로 아주 조금씩 서로를 알게 된다. 잠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미소를 주고받으면서, 각자의 받아쓰기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알게 된 불완전한 정보의 부스러기를 모아 그들을 기억해 본다.   

 

32년생 할아버지 가족    


작은 체구로 온 힘을 다해 산에 오르던 할아버지. 조금 힘겨워 보이셨지만 지팡이도 없이 한발 한발 내딛던 모습이 눈에 선 하다. 왕년에 산 좀 타셨는데 지리산만 못 와보셔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오셨단다. 따님과 사위가 동행하고 있었다. 5박 6일의 넉넉한 일정으로, 할아버지의 산행은 따님이 같이 하고, 사위는 먼저 대피소에 가서 밥을 지어놓고 기다리는 식으로 산행을 하고 계셨다.   

  

오르막길에서 할아버지의 뒤를 한참 걸었다. 잠시 쉬시는 동안 앞서가려 했으나 할아버지는 안간힘을 다해 천천히, 쉬지 않고 오르셨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할아버지 옆으로 가서 “선생님, 죄송하지만 먼저 가겠습니다.”하며 앞질렀다. 그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묘한 눈빛과 거친 숨소리를 잊을 수 없다. 오기와 회한이 복잡하게 뒤섞인 그 눈빛을...        

 

할아버지를 앞질러 왔던 나는 무릎이 아파 천왕봉을 코앞에 두고 완주를 포기했다.  할아버지는 과연 천왕봉에 오르셨을까? 그 묘한 눈빛을 떠올려 보건데... 할아버지는 틀림없이 정상에 오르셨을 것이다.   

       

2010년 11월. 지리산 노고단대피소

중년의 아버지와 대학 4 학년 딸   

 

사회생활을 앞 눈 딸을 위해 아버지가 준비한 의미 있는 여행일 것으로 추측된다. 길도 길이지만 날씨가 예상 밖으로 추워서 아버지가 이래저래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딸에게는 작은 배낭만을 매게 하고, 모든 짐을 자신이 앞뒤로 지고 있었다. 대피소에 도착해서도 아버지는 서툰 손길로 부지런히 음식을 준비했다. 밥을 기다리는 딸의 표정으로 보아 그녀는 산행을 별로 원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다음날 점심, 우리는 눈 내리는 연하천 대피소에서 만났다. 그들은 사람들이 식사를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설 무렵에야 도착했다. 딸은 많이 힘들었는지 대피소가 반가워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고, 아버지는 그 뒤에서 지친 모습으로 말없이 버너를 켜 라면을 끓였다.     


그날 저녁, 부녀는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벽소령 대피소에 당도했다. 아버지는 허리가 아파 주저앉았고, 딸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가며 버너를 켜고 햇반을 데웠다. 세대의 오버랩이 시작되는 풍경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뿌리는 파스를 아버지의 허리에 뿌려 주었다. 취침실에 파스 냄새가 진동했고, 저쪽 구석에서 잠을 청하던 아저씨가 우리를 째려보았다. 상관없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여기는 산 속, 3대 1이다.     

  

3일차 오후, 세석 대피소. 내가 무릎 때문에 산행을 포기하고 구석에 낙담해 있을 때, 다시 길을 나서던 부녀가 삼촌에게 내 이야기를 듣고는 바쁜 눈길로 나를 찾았다. 나는 갈 길 바쁜 그들의 수고를 덜어주고자 그들에게 나아가 인사를 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그들의 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아버지는 허리는 아플지언정 세상 평온해 보였고, 힘든 산행에 급속히 적응한 딸에게서는 강한 자신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와 딸로 산에 든지 3일 만에 인간 대 인간이 되어 있었다.


2010년 11월. 지리산 연하천대피소

부산 사나이  

   

골프선수 최경주를 연상시키는 다부진 몸매에 강인한 인상의 청년은 부산에서 혼자 왔단다. 예전에 진주 쪽에서 올라와 지리산을 종주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구례 쪽에서 진주로 넘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유달리 부지런한 청년이었다. 언제나 취사장 구석에서 뭘 해 먹는지도 모르게 뚝딱 끼니를 해결하고는 서둘러 길을 나섰고, 저녁에 대피소에 도착해 보면 벌써 밥을 다 먹고 숙소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첫날 아침에 그의 옆에서 잤던 삼촌이 넌지시 웃으며 코를 많이 골더라고 말하자 그는 순진하게 웃었다.    

 

이틀째 밤, 우리가 대피소에 도착해 취사장으로 향하고 있을 때 그 청년은 대피소 거실에 걸린 지도를 보고 있었다. 자기 전에 내일의 코스를 점검하는 근면한 모습. 그날 밤, 청년의 잠자리는 내 옆자리였다. 그는 뭘 잘못 먹었는지 속이 불편해 내일 내려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지도를 보며 찾고 있던 것은 올라갈 길이 아니라 내려갈 길이었던 것. 그날 밤 그는 생각이 많아서인지 코를 골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는 많이 괜찮아 진 것 같다며 산행을 계속하기로 했다고 했다. 아침 저녁으로 커피를 내릴 때마다 준비해 온 원두가 적기도 하고, 누군 주고 누군 안줄 수도 없어 안면 몰수해 왔는데, 그가 힘을 내기 바라는 마음으로 한잔을 건넸다. 커피를 단숨에 들이킨 그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컵을 건네주고 또 다시 서둘러 출발했다. 그것이 부지런한 그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2010년 11월. 지리산 벽소령대피소에서의 융드립

LA 아주머니     


친구 네 명이 같이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른 친구들은 모두 돌아가고 혼자 지리산으로 오셨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만날 때마다 아주머니의 카메라를 건네받아 사진을 찍어드렸다. 취사도구를 준비하지 않으셨는지 취사장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이틀째 저녁에 대피소 거실에서 잠깐 뵈었는데 로프를 잡고 오르는 코스에서 상당히 무서웠다며 내일은 우리와 같이 가야겠다고 하셨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아주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 우리가 일찍 일어난 편이 아니었으므로 아마도 먼저 출발하신 것 같았다. 이민생활을 하며 게으른 사람을 기다려 줄 틈 없이 살아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편안한 동행자를 만나신 것일지도...    


2010년 11월. 지리산 벽소령대피소

인천 등산모임 아저씨들    


국내의 명산을 섭렵 중인 50중반의 인천 친구들 모임이다. 이제 백두산만 남으셨다고 했다. ‘산에 와서는 잘 먹는 것이 우리 스타일’이라고 한 얘기가 허언이 아니었다. 쌀은 10킬로짜리 포대 그대로, 포기 째 담긴 김치가 여러 봉지, 김은 자르지 않은 가정용 김, 마른반찬도 작은 반찬통이 아닌 커다란 김치통에 담아 오셨다. 거기에 훈제치킨, 삼겹살, 각종 과일 등... 이번에는 해물을 챙기는 분이 빠져서 그나마 음식이 적은 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분들 첫날부터 코펠을 산장에 놓고 오셨단다. 코펠 담당이 죽일 놈이 되어 계셨다.    


많이 먹어서 음식물을 줄여야 갈수록 짐이 가벼워지는데 코펠이 없다보니 음식이 줄지 않는 모습이었다. 코펠을 빌려 쓰는 것도 한 두 번인지라 산행을 포기할까 하다가 결국 제일 만만해 보이는 우리를 식사 파트너로 포섭하신다. 적당한 나이, 헐렁해 보이는 인상 때문이었겠지만, 삼촌이 챙겨간 소형 압력밥솥도 그분들의 주목을 끄는데 한몫 했을 것이다. 졸지에 서울 동상들이 되었다.     

 

여섯 명의 고정 맴버 중 두 명이 불참하여 선배 한분과 막내 한분이 합류했다고 하는데, 계급장 떼고 붙으면 가장 쎌 것 같은 아저씨가 막내라며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은근히 엄격한 위계질서가 그 분들의 직업을 궁금하게 했다. 우리가 그만 내려가야 할 것 같다고 하자 그분들은 압력밥솥을 팔라고 하셨다. 결국 택배로 돌려받기로 하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큰 형님은 인천에서 라이브 바를 운영하시는 분이었다. 압력밥솥에 예전에 산에서 채취한 겨우살이를 채워서 보내주시겠다고 했는데... 밥솥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 글을 쓰고 나서 2주 후,  압력밥솥을 택배로 받았다. 밥솥에는 겨우살이가 가득 담겨있었다.)   


2010년 11월. 지리산 벽소령대피소 이정표

대피소 직원들  

  

해맑은 얼굴의 산장지기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그분들은 우리의 공중질서 문란행위나 아쉬운 소리를 미리 차단하려는 듯 차가운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다. 아쉬운 소리를 해보아야 대부분 국물도 없다. 하긴 여기는 죄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 밖에 없을 것이므로... 또 위급한 상황에서 우리를 구해 줄 사람은 그들뿐이므로... 그 냉정한 표정도 사고예방과 자연보호의 일환이겠거니 한다. 그래도 조금만 더 친절하고 따뜻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반달곰    

반달곰 주의, 반달곰을 만났을 때 대처하는 요령을 알리는 수많은 표지판을 만났다. 하지만 반달곰은 만나지 못했다.         

    

2010년 11월. 지리산 천왕봉 전경

세석대피소에서 발길을 돌려 하산하는 내내 아쉬웠던 것은 천왕봉의 일출이 아니었다. 그 순간 사람들과 나누었을 뜨거운 미소와 자연스럽게 더 알게 되었을 그들의 이야기가 더욱 아쉽고 궁금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인간은 천천히 걷는 동안 가장 빠르게 변해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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