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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Apr 04. 2019

두고 온 여행들

에필로그

오직 여행    


옛날 옛적, 사막을 건너는 여행자가 유목민의 환대에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막 너머의 세상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적어도 밥값이 아깝지 않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좋은 여행자라 할 수 있었다. 돌아와서도 마찬가지. 일상을 감당해 준 가족들, 무사귀환을 기원해 준 친구들, 경비를 대준 후원자들에게 재미있고 유익한 여행이야기를 풀어 놓는 것이 여행자의 마지막 임무였다.  

   

그렇다면 요즘은? 방송에서는 여행과 음식의 콜라보가 대세. 한동안 온통 ‘여행’ 아니면 ‘음식’인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여행가서 먹는 이야기’로 합쳐지고, 거기서 한 번 더 업그레이드 되어 ‘한 달 살며 식당 개업’을 하는 형국이다. 먹는 이야기 빼고 그저 여행이야기만 하기엔 이제 세상이 너무나 뻔하고 작아진 것일까.   

  

방송은 방송일 뿐이고, 반짝반짝 빛나는 여행 작가들이 많지만... 여행과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여행에 힘을 보태고 싶었다. 아무리 여행이 흔해졌어도 ‘그때, 그곳, 당신’만의 순간은 여전히 남아 있고, 그 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 여행의 큰 즐거움이자 보람이 될 수 있음을 끝까지 우기고 싶었다. 

     

밥값을 다하지 못한 채 연재를 마친다. 이것이 나의 최선이자 한계. 단점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장점이므로 뼈가 시릴 정도로 아프지는 않다. 어쩌면 지난 여행의 기억을 다 털어낸 지금부터 '진짜 여행', '밥값을 하는 여행기'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두고 온 여행들을 정리해 본다.  

  

2018년 오키나와에서

실패한 여행들    


매거진 제목 ‘풍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에 나오는 문장이다. 자신과의 대화를 멈추지 않는 한 풍경은 반드시 진실을 드러낸다. ‘그 순간은 온다’는 믿음이 있기에 나는 주저 없이 떠날 수 있다.      


물론 그 순간을 만나지 못할 때도 있다. 스위스, 베니스, 태국, 싸이판에서 나는 그 순간을 만나는데 실패했고, 그 여행들은 결국 여행기가 되지 못했다. 당연히 그 책임은 그곳이 아닌 나에게 있고, 성취하지 못한 그곳과의 ‘연결’은 찐득한 덩어리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멀리서,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막힌 혈관을 뚫을 통로를 찾고 있다.  


200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중국과 스페인도 아쉬움이 큰 곳이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 10년 동안 여행과 출장으로 매년 중국을 드나들었다. 수많은 모험과 추억에도 불구, 급변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는 중에 처음 느꼈던 애정과 호감이 다 증발되어 버렸다. 새로운 중국을 만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함을 느끼는 중이라고나 할까.  

   

스페인이야말로 제대로 실패한 여행이라 할 수 있다.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 말에 절대 공감한다. 감당할 수 없는 인상과 풍경에 ’좋은 여행, 좋은 여행자란 뭘까?' 를 처음으로 고민하게 만든 그곳. 스페인은 지금까지도 내 여행의 ’시험대‘로 남아 있다.  


계획대로라면 나는 머지않아 다시 그 시험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스페인 카스티야에서

두고 온 여행들    


여행하면서 별다른 불편을 못 느끼는 편이다.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쌀 수 있을 때 싸고, 잘 수 있을 때 잘 잔다. 더위와 추위에 강하고, 지루함과 불이익을 잘 감수하는 편이다. 하지 말라는 일은 안하고, 과음은 하고 싶어도 못한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호기심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써놓고 보니 참 실속 없는 인간형...)  

     

여행 할 때 제일 힘든 일은 따로 있다. 여정의 끝에서 계속 앞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을 잠재우는 것이 그것이다. 그럴 때는 지구가 둥근 것이 원망스럽다. 눈앞에 있는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나를 두고 돌아설 때마다 뭔가 큰 기회를 날리는 기분에 휩싸인다. 언제나 다음번이라는 허망한 약속을 남기고 돌아서지만, 그 약속이 지켜진 적은 거의 없고, 같은 곳으로 떠나 여정을 이어 붙여 본들 매끄럽게 이어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억지로라도 이어붙이고 싶은 여행들이 있다. 미지의 나라 알제리 여행은 일종의 탐험과도 같았다. 황량하고도 이국적인 풍경 속에 서민적 일상이 조용히 출렁이는 그곳을 다 알기에 열흘은 너무도 짧았다. 바다로 열린 로마궁전이 있는 ‘티파자’에 서서,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배경이자 스페인 풍 국제도시 ‘오랑’을 두고 돌아서야 했다. 사전준비가 부족해 가지 못한 사하라 사막, 애증의 바다를 오가는 ‘알제-마르세이유’ 간 페리여객선도 남겨 두고 왔다.   


2017년 알제리 콘스탄틴에서

또 하나의 두고 온 여행은 '히말라야 라운딩'이다. 험난한 여정 끝에 도착한 중국 윈난 성의 샹그리라. 히말라야의 입구에 불과한 그곳에서 느꼈던 차오르는 고원의 기운을 잊을 수 없다. 이제는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린 샹그리라를 다시 찾아 나서야 한다.   

  

고백컨대 나는 그때 느낀 한줌의 히말라야에 10권의 책을 보태 가보지도 않은 '히말라야 라운딩' 다큐멘터리 대본을 써 준적이 있다. 그곳에 가보고자 하는 일념으로 작가적 양심을 외면했으나... 다큐는 촬영 직전 무산되었고, 내 가슴에는 양심의 가책만 남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히말라야에 간 여주인공의 내레이션은 이랬다.


“오늘은 충분히 걸었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해도 좋다는 비장한 심정으로 왔는데 

태어나서 이런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몸이 가볍다. 

저 끝까지 살아서 올라갈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나는 좀 더 일찍 이곳에 와야 했다.

그랬다면 분명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 안나푸르나 라운딩 3일차, 촘롱 롯지에서    


히말라야가 또 다시 나를 부른 것은 알제리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었다. 자다 깨서 모니터의 지도를 보니 비행기가 히말라야를 넘고 있었다. 창문 덮개를 살짝 밀어 올려 밖을 내다보았다. 헉! 바로 발밑에 거대한 산봉우리가 뾰족하게 솟아 있고, 그 사이로 강물같은 빙하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낭가파르바트의 정상이었다. 폴짝 뛰어 내리기만 하면 정상에 깃발을 꽂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고 선명했다.   

  

사진 찍을 시간을 아껴가며 그 광경을 눈과 몸에 담았다. 최근 10년 간 그토록 가슴이 뛰었던 적이 있었던가. 두근거림은 비행기가 내려앉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때를 다시 떠올리는 지금도 금새 심장이 벌렁거린다. 입구와 상상, 발 밑을 거쳐 히말라야는 그렇게 거대한 숙제가 되어버렸다. 


언젠가 그곳에 간다면 틀림없이 혼자 이렇게 중얼거릴 것만 같다.     

나는 좀 더 일찍 이곳에 와야 했다고. 

그랬다면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라고.  

 

2006년 중국 윈난 성 리장에서

쓰고 싶은 여행


작년에 작가들의 여행에 관한 책을 냈다. 위대한 작가들이 왜 여행을 떠났는지, 어떤 여행을 했는지, 그리고 돌아와 어떤 걸작을 써냈는지를 나름 혼신을 다해 풀어 썼다. 여행, 문학, 역사, 예술을 한 번에 쌈 싸먹는 것이 기획의도였으나, 결국 분류하기 대략난감한 도서가 되어 서점마다 제각기 다른 섹션에 숨어 있게 된... 나의 <문득 여행>. 

   

책 속의 여행 중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주저없이 시인 하이네의 <하르츠 기행>이라고 대답한다. ‘하르츠’는 독일 중부의 산악지대로 과거 동서독의 경계가 되었던 곳이다. '괴팅겐'에서 대학을 다니던 하이네는 적성에 맞지 않는 법학공부에 괴로워하다 하르츠로 도보여행을 떠났고, 이 여행을 여러 편의 시와 여행기로 남겼다.      


동독 쪽으로 치우친 비무장지대였기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하르츠는 독일인들의 트레킹명소이자 이야기의 보물창고인 곳이다. ‘괴팅겐’을 출발해 하르츠 고원의 ‘브로켄 산’과 ‘일제 계곡’을 지나 ‘바이마르’로 이어지는 여정이야말로 인문기행을 위한 최적의 여행지가 아닌가 한다.  

  

‘괴팅겐’은 4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대학도시일 뿐만 아니라 근처에 바흐의 고향이 있기도 한 곳. 그림형제 또한 이곳에서 대학을 다녔고, 틈만 나면 하르츠 산속으로 들어가 어둑한 산동네에 전해 내려오는 괴괴한 전설과 잔혹한 동화들을 수집했다.  

   

‘발푸르기스의 밤’이라 불리는 마녀들의 집회가 열렸던 ‘브로켄 산’, 일제공주의 슬픈 사랑이 전해오는 ‘일제계곡’이 트레킹의 하이라이트이다. 그렇게 산을 넘으면, 괴테가 파릇파릇한 천재들에 둘러싸여 말년을 보냈고, ‘실러’와 오랜 우정을 쌓기도 했던 튀링겐 주의 ‘바이마르’가 나온다. 바이마르에는 괴테뿐 아니라 ‘리스트’도 있고, 나치의 ‘부헨발트 수용소’도 있다.      


독일의 대자연과 문화예술, 그리고 신비로운 이야기가 가득한 하르츠를 알게 된 이후, 그곳야말로 나를 위한 여행지라고 생각해 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묵직한 여행기 한 권을 써서 돌아오고 싶지만...

바보처럼 누군가 등 떠밀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2018년 L.A 허모사 비치에서

브런치 연재를 마치며 


브런치에 연재신청을 한 것은 약속과 감시 없이

제대로 된 글을 끝까지 쓸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설픈 여행들에 귀한 자리를 내어주신 ‘다음 브런치’와

하트와 공감, 구독과 댓글을 보내주신 구독자님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지난 여행을 끝까지 돌아볼 수 있었답니다.       


실패한 여행, 두고 온 여행, 쓰고 싶은 여행 다 놔두고 

이번에도 예상치 못했던 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여행과 여행기의 출발이 라오스가 될 줄이야...


생각은 많아도 마음만은 가볍게

잘 다녀오겠습니다~^^   


고마워요 브런치!

고맙다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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