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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Mar 28. 2019

그날 아침의 'Let It Be'

강릉 편

딸아이가 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같이 여행을 해야겠다고 늘 생각해왔다. 나 자신이 뒤늦게 여행의 맛을 알게 된 아쉬움도 있었고,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소통과 교감을 이어가고자 하는 ‘원대한’ 바람도 있었다.     


특히 딸아이는 자기표현이나 감정표현이 없는 편으로, 겉으로는 얌전한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아이에 속한다. 중학교 3학년인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내적인 질풍노도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스마트 폰과 일본 애니에 빠져 지내는 것이 가장 큰 갈등요인이었다.     


대화 이전에 교감이 필요했다. 아울러 좋은 풍경을 보면 캐릭터를 베껴 그리는 것 말고 자신만의 그림에 눈을 뜨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여행, 소통, 그림... 아이와의 여행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원대한 바람과 욕심은 끝없이 불어났다.      


그 때 생각나니?    

    

2017년 2월. 드디어 딸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애초 겨울방학에 다녀올 예정이었으나 막상 여행지를 정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방학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봄방학을 앞둔 어느 날, 밥을 먹던 딸아이가 불쑥 “정동진?” 하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얼마 전 재미있게 읽은 청소년 소설에서 주인공이 정동진에 가는 장면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 니가 나보다 낫구나!’     

그것으로 고민은 해결되었고, 서둘러 2박3일로 일정을 짰다. 


청량리 역 밤차 - 정동진 일출 - 안목 해변 - 강릉 게스트하우스 1박 - 양떼목장 - 경교장 한옥스테이 - 오죽헌 - 정동진 역 - 청량리 역        


야간열차를 타기위해 밤 9시에 시내버스를 탔다.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어디론가 출발하는 기분이 묘했다. 어제와 같은 서울이되 지나가는 곳마다 새록새록 추억이 돋았다. 광화문을 지날 때는 지난겨울 아이와 함께 촛불을 들었던 기억이, 청량리 역에서는 아이 유치원 때 ‘아빠와 함께 하는 기차 여행’라는 명목으로 끌려가듯 남이섬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유치원 원장님은 잔인하게도 아이들 앞에서 아빠들의 씨름경기를 열었다. 나의 몸무게는 60키로 중반.  80키로가 족히 넘는 거구의 아빠들을 차례차례 상대해야 했다. 번쩍 번쩍 들어 올려 지면서도 아이 앞에서 지는 게 싫어 악착같이 버틴 끝에 결승진출! 승리의 기쁨보다는 들어 올려 질 때마다 느껴지는 굴욕감이 더 컸다. 엉덩이가 바지를 있는대로 삼키고 있었기 때문. 차라리 첫 판에 졌으면 될 것을 그 놈의 승부욕이란...

     

결승상대와 맞잡았을 때 온몸에 전해오던 그 육중한 기운이 아직도 생생하다. 커다란 바위를 끌어안은 기분이었달까. 시작과 동시에 공중으로 들어 올려 져 허공과 바닥을 오가며 버티기를 여러 번, 나는 더 이상의 굴욕감을 견딜 수 없어 공격을 감행했고, 결국 처참하게 바위 아래 깔리고 말았다. 권력은 힘의 산물이 아닌 인내의 산물이라고 했거늘...    


혼자 추억에 젖어 아이에게 물었다.    

“너 그때 생각나니?”

“간 거는 기억나는데 그게 여기였는지는 모르겠어...”    

아이는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스마트 폰으로 눈길을 돌렸다. 

내가 누구때문에 그 모든 굴욕을 감수했는데... 하는 촌스러운 원망이 밀려왔다.


울적한 마음에 밖으로 나가 담배를 물었다. 문득 아이에게 말하지 못한 청량리 역에 대한 추억이 하나 더 떠올랐다. 대학 1학년 때, 등교를 하다 버스에서 충동적으로 내려 청량리 역으로 와 무작정 춘천 가는 기차를 탄 적이 있었다. 19살에 원하던 대학에 입학해 그토록 바라던 자취생활을 시작했지만, 현실의 대학생활과 서울살이는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았다. 여러 이유로 배신감과 허탈감에 빠졌고, 그러던 차에 ‘춘천 가는 기차’라는 노래가 기름을 끼얹은 것이었다.  

    

춘천이 어딘지 몰라 무작정 남춘천에서 내렸다. 남춘천 역은 진짜 춘천이 아닌 듯 너무나 썰렁했다. 기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만은 노래로 듣던 그 느낌이었는데... 갈 곳 모르고 광장 주변만 빙빙 돌다가 겨우 밍숭맹숭한 막국수 한 그릇을 사먹고 다시 돌아왔더랬다. 그 시절의 나와 너무도 닮은 짧은 여행의 추억.  

   

‘아이도 언젠가는 땡땡이를 치고 뜬금없이 어디론가 떠나는 날이 있겠지?

어쩌면 그날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올지도 몰라.  

그때가 되면 알고도 모른 척 해야겠지? 그런데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실패한 일출     


밤차는 방학 막바지의 대학생들로 바글거렸다. 아이와 나의 좌석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아이가 혼자 있어야 더 많은 것을 느낄 것 같아 굳이 좌석을 바꾸지 않았다. 저 멀리서 스마트 폰을 보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잠시 눈을 감았다. 잠깐 졸다 눈을 떠보니 기차는 벌써 정동진에 들어서고 있었다.      


새벽 4시 반. 일출을 보려면 두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새벽영업 중인 카페는 일출을 보러온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어렵사리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두 시간을 때우고 해변으로 나갔다.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며 홍시 같은 붉은 태양이 소혀처로 떠오르길 바랐건만... 해는 낮게 깔린 구름 뒤에 숨어서 부지불식간에 날을 밝히더니 구름 사이로 잠깐 얼굴을 내비쳤다가 다시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소혀처로 뜨는 일출은 언제 볼 수 있을는지.  


아무튼 일출의 맛은 지루하게 기다리며 뭔가를 정리하고 계획하는 것. 아이에게 뭔가 의미 있는 말을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그 동안 학교 다니느라 고생했다.”

“아빠도요.”

“중학교는 더 힘들 텐데, 힘든 일이나 고민 있으면 무엇이든, 언제든 아빠나 엄마한테 얘기해. 알았지? 힘내고!” 

“네...”        


첫 날 본 정동진 일출과 다음 날 본 강문해변의 일출


내 나름 여행의 원칙은 가급적 택시를 타지 않는 것. 출발 전 아이에게도 그것만은 미리 못을 박아 놓은 터였다. 물어물어 버스정류장을 찾아 카페거리로 유명한 안목해변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멀리 보이는 강릉시내의 빙상경기장이 겨우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안목카페거리의 딸기타르트로 유명한 카페를 찾아갔다. 바다를 향해 창이 훤하게 뚫린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아이는 와이파이를 찾느라 분주했다. 틈을 주지 않고 벼르고 별렀던 한 마디를 던졌다.     

“바다 그림 한 장 그려보는 게 어때?”     


아이는 온순하게 가방에서 색연필과 공책을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보다야 잘 그렸지만 캐릭터 그림만큼의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 그림이었다. 그리란다고 열심히 그려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할 일... 이래저래 평을 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림 아래에 사인을 남길 것을 권했다. 모든 그림은 사인이 있어야 더 가치가 높아진다는 말과 함께.     


여행을 계기로 예술혼을 불태우길 바랐지만 결국 이 그림이 유일한 풍경화로 남았다.

        

강릉 해변 걷기  

    

카페에서 나와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안목해변 끝자락부터 솔숲이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제법 숲 분위기가 날 정도로 나무가 많았고, 바람이 불때마다 솔향기가 퍼져 하루 종일이라도 걷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얼마 걷지도 않고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설마 이 정도 걷고 진짜 다리가 아플 리가. 의지와 목적의식이 부족해 보였다.  


가슴 밑바닥에서 오기와 투지가 올라왔다. 여행에서는 늘 약간의 고생을 감수해야하고, 그 고난 끝에 더 좋은 풍경을 만날 수 있음을 증명해보이고 싶은 욕구가 발동했다. 걷고 쉬고, 또 걷고 쉬고... 솔숲과 한적한 해변을 오가며 강문해변까지 걸었다. 때때로 아이가 풍경을 즐기는 듯 할 때마다 속으로 보람을 느끼며 걷고 또 걸었다.       


강문해변에서 쉴 곳은 유명한 햄버거 가게였다. 번호표를 받고 가게 앞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와이파이 존에 진입한 아이는 꿀을 빨았고, 폴더폰인 나는 벌을 받듯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돈 내고 얻어먹기’를 순전히 부성애 하나로 견뎌냈다.     


너무 오래 기다리기도 했고, 또 식당이 너무 혼잡하여 솔직히 뭔 맛인지도 모르고 급히 배를 채웠다. 접시를 다 비우고 보니 아이의 식사는 시작국면을 막 벗어나고 있었다. 또 다른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 앉기까지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가. 본전생각을 하며 아이를 재촉하지 않고 커피를 홀짝였다. 식당은 음료를 덤으로 더 팔고, 그러면서 다른 손님의 기다림은 더 길어지는 맛집의 부조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식당에서 나와 경포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마을 안길을 걷고, 논밭 사이 황량한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기도 하면서... 우리는 끝내 경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해변을 일주했다는 성취감을 나누고 싶어 아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이는 마치 긴 고문을 당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감격을 나누는 대신 수업종료 벨소리를 울렸다.      

“그래 오늘은 이만 하고 일찍 숙소로 가서 쉬자.”   


아이는 이때 이미 지쳐있었다...는 걸 나는 몰랐다.


버스를 타고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싸고 친절하고 깔끔한 그곳의 유일한 단점은 접근성. 버스에서 내려 또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일요일의 게스트하우스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애초부터 2인실이 아닌 각자 남녀 도미토리를 예약했다. 잘 때만이라도 떨어져 있는 것이 서로의 정신건강에 좋을 것같았기 때문이었다. 또 모르는 언니들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다음날 아침 8시에 주방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남녀의 방으로 헤어졌다. 홀가분하게 침대에 누워 돌이켜보았다. 어제 밤부터 꼬박 24시간동안 계속 돌아다녔으니... 강행군은 강행군이었다.     

‘아이는 괜찮을까?’     

하지만 걱정은 길게 가지 않았다. 눈을 감자마자 곧바로 골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목장에서의 하루        


다음날 새벽, 강문해변에 나가 일출을 보고 들어왔다. 다행이 아이는 제시간에 주방으로 나왔다. 다리에 알이 벤 것 말고는 다 괜찮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어젯밤 도미토리에서는 스물아홉 살 언니와 둘이 잤는데, 그 언니의 친구는 어제 가고 혼자 여행을 더 하고 있다고 했다고 했다. 방을 따로 쓰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을 잘 먹고 숙소를 나섰다. 대중교통으로 양떼목장을 가자면 버스를 세 번 타야했다. 숙소에서 강릉터미널까지 시내버스, 강릉에서 횡계 가는 시외버스, 횡계 터미널에서 목장 가는 셔틀버스. 갈아 탈 때 마다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그래도 걷지는 않아서 그런지 아이도 잘 견뎌주었다.    

 

양떼목장과 등산로의 입구는 하나였다. 곰배령으로 오르는 등산객들을 내심 부러워하며 목장으로 향했다. 목장은 저 푸른 초원이 되려면 한참 남은 누런 빛깔이었지만, 여러 겹의 언덕과 산봉우리가 만들어내는 능선이 보기 좋았다. 높이 올라갈수록 풍경은 더 장쾌해질 것이 틀림없었으나... 아이는 목장 초입부터 얼마나 더 가야하느냐고 계속 묻고 있었다. 능선을 가리키며 저렇게 한 바퀴 돌아야 한다고 하자 아이는 마치 지옥문 앞에 선 듯 절망했다.  

   

즉시 목장일주를 접고, 양떼목장에 왔으니 양이라도 보고가자고 달래 축사 쪽만 돌고 내려가기로 했다. 한 바구니에 3천 원 하는 건초를 사서 양들에게 먹였다. 양들은 생긴 것과 달리 식탐이 대단했다. 사람이 아닌 바구니를 향해 돌진하며 당당하게 풀을 요구했다. 식욕을 잠재우자면 한 끼에 3십만 원 어치도 부족할 판. 하지만 아이는 저돌적인 양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니면 모든 게 다 귀찮아졌는지 그닥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하긴 양이 풀 씹어 먹는 게 뭐 그리 특별한 일이라고...        


횡계 시외버스터미널과 양떼목장과 어린 양들

강릉으로 돌아와 중앙시장으로 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역인 듯 힘들어하는 아이의 눈치를 보며 시장골목을 돌아다니다 건어물 가게 주인에게 밥집을 물었다. 추천 받은 식당은 시장상가 2층의 백반집. 아이도 지치고,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나도 지쳤다. 옆 자리에는 탄핵반대집회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는 경상도 아저씨와 아주머니들까지 하하호호 거리고 있었다. 반찬을 내주던 아주머니가 둘이 여행을 왔느냐고 묻더니 속도 모르고 한 마디 했다.    

“요즘 애들이 어디 부모 따라다니나요? 딸이 엄청 착하네.”    

나는 입을 꾹 닫은 채 애꿎은 황태구이만 잘근잘근 씹었다. 어쨌거나 강원도 황태는 맛이 좋았다.     

   

그날 아침의 '렛 잇 비' 


두 번째 숙소는 선교장 한옥스테이. 강릉 양반가 99칸 고택의 방을 내주는 곳이 있다고 해서 예약한 곳이었다. 500백년 된 소나무들에 둘러싸인 평평한 터에 여러 채의 고택이 자리한 고풍스러운 공간이었다.   

  

우리 방은 러시아 공사가 선물했다는 테라스가 이채로운 본채 ‘열화당’을 마주한 행랑채. 문을 열면 열화당이 보이고,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매화꽃 향기가 방안으로 솔솔 들어왔다. 아이도 조용한 이곳이 마음에 드는지 이곳저곳 둘러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옛 한옥이지만 난방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방도 따뜻했다.  

   

조그만 방 두 칸 사이 미닫이문을 닫고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스마트 폰 배터리가 줄어가는 동안 아이의 지친 영혼은 충전되고 있겠지? 잘 고른 숙소 덕에 힘들었던 하루를 해피엔딩으로 끝낼 수 있었다.  

      

매화 핀 선교장과 뒷산 솔 숲, 방 문 밖 야경

선교장의 아침은 순두부였다. 밥을 먹고 나오는데 커피가 땡겼다. 종이컵은 있는데 커피가 없길래 물었더니 아주머니가 커피믹스 몇 봉을 가져다주었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방으로 가는 중에도 오늘은 오죽헌인데 또 얼마나 걷기 힘들어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또 다시 길을 나서기 위해 가방을 싸는 도중, 아이의 추리닝 주머니에서 커피믹스 한 봉지가 툭 떨어졌다.     

“커피 먹고 싶었니?” 

“응.” 

“얘기하지...” 

“괜찮아요.”    

평소 아이가 커피를 먹고 싶어 하는 눈치가 보이면 엄마 몰래 한 잔씩 따라주는 사이건만... 오늘 아침엔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혼자 커피를 마시며 걸어가는 뒷모습이 얼마나 야속했을까.  

   

찜찜한 마음으로 선교장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10분, 20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졌고, 아이는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벌써부터 지쳐가는 모습이었다. 농담을 툭툭 던져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시작부터 망한 분위기. 이윽고 버스가 도착했다. 시내버스 안도, 창밖도 이젠 더 이상 낯설지도, 새롭지도 않았다.  

   

오늘로 여행은 끝난다. 행복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여행, 소통, 그림은 고사하고 아이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 버스 라디오에서 비틀즈의 ‘Let it be'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보다 한두 살 많았을 때 좋아했던 노래. 가사는 몰라도 끝없이 반복되는 ’렛잇비(내비둬)~ 렛잇비(내비둬)~‘ 만으로도 공감 충만하고, “나 나 나 나나나 나~”에 몸을 흔들다 ’쭈 쭈라 쭈라 쭈라 쭈라 와우~‘ 하는 절규에서 심장이 찌릿해지던 그 노래.      

   

음악이 흐르는 동안 ‘나는 왜 ‘렛 잇 비'를 그토록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싫었던 것 같다. 어른들에게 혼나는 것도 싫고, 관심 받는 것도 싫었다. 나를 쳐다보는 것도 싫었고, 그렇다고 무시당하는 것도 싫었다. 혼자 음악 듣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자 즐거움이었기에, 음악만 듣게 ’내비둬‘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다 막상 대학 입학으로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났을 때 감당할 수 없는 공허와 허무에 빠졌고, 그래서 어느 날 아침 뜬금없이 춘천 가는 기차에 올랐던 것이었다.  

“렛잇비~ 렛잇비~”     


딸아이는 지금 그때의 나와 같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중이었다. 터널은 터널일 뿐 누구의 터널이 더 어둡다 말할 수는 없다. 거기다대고 고작 2박3일의 여행에 그 많은 기대를 품었으니... 확실히 그 기대 때문에 나는 더 옹졸해져 있었다. 기대가 때로, 아니 자주 관계를 망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며 일생에 한 번 뿐인 여행을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 나 나 나나나 나~”    


돌이켜보면 아이는 그 와중에도 해변일주를 끝까지 함께 했고, 족히 열다섯 번은 넘게 버스를 탔으며, 그리라는 그림도 그렸다. 그리고 지금도 별 흥미도 없는 오죽헌으로 묵묵히 따라가고, 아니 끌려가고 있다. 이 정도면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헛된 바람에 눈 먼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을 뿐.      

’쭈 쭈라 쭈라 쭈라 쭈라 와우~‘   

 

그날 하루 내내 ‘렛 잇 비’를 주문처럼 외웠다. '쉬고 싶어 할 때까지 걷기'가 아니라 '걷고 싶어 할 때까지 쉬기'를 반복했다. 내가 투명인간이 되어 갈수록 아이는 더 편안해 보였고, 그러자 여행은 지극히 평화로워졌다. 아이와 여행하는 법을 여행 마지막 날에야 알게 되다니... 왜 나의 깨달음은 늘 한 템포 늦게 오는지. 그렇게 이상으로 돌아가서도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함을 마음에 새겼다.  

   

청량리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아이에게 물었다.    

“다음에 또 아빠가 여행가자면 갈래?”

“...응... 걷지만 않으면.”    


딱 잘라 안 간다고 안 해서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불쑥 딸아이의 터널은 적어도 내가 지나온 터널보다는 덜 어두웠으면 하는 바람이 솟았고, 곧바로 그 또한 얼마나 부질없는 기대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충고했다.



강릉 이후 


강릉 여행이 엊그제 같은데 아이는 벌써 중3. 그 사이 우리는 먼 미래의 일 같았던 평창올림픽에서 릴레이로 성화 봉송을 했고, 아이는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으며, 나는 지난 달 스마트폰을 했다. 아이는 이 글의 대문에 걸 그림을 새로 그려주었고, 나는 이번 졸업여행은 좀 더 멀고 길게 가기위해 작년부터 적금을 붓고 있다.   


적금통장이 카드 값의 칼날을 피해 끝까지 무사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 달에 한 번 내가 째릴 때마다 통장이 '렛 잇 비! 렛 잇 비!' 소리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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