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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Jun 28. 2019

라오스의 베트남전쟁, 그리고 ‘누스’

라오스 폰사반 밤비스 레스토랑에서의 마지막 밤

폰사반 시내에는 가게 입구에 두 개의 커다란 포탄을 기둥처럼 세워놓은 레스토랑이 있다. 그 이름도 'Bombie's(불발탄) 레스토랑' 식당 겸 카페 겸 여행사다. 사장은 40대 초반의 사내 ‘누스(Nouds)’.    

 

폰사반에 도착하던 날 저녁 그를 처음 만났다. 10시간 버스를 타고와 숙소를 정하고 나서 내일 항아리 평원 데이 투어를 예약하기 위해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여행자 거리에 대여섯 군데의 여행사가 있었지만 외국인 관광객이 거의 없는 비수기인지라 모두 개점휴업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비수기 데이 투어 예약 


동네를 두 바퀴 돈 끝에 고른 곳이 Bombie's restaurant 였다. 카운터 옆 긴 의자에 더위에 지친 여자아이(한니)만 자고 있어 그냥 지나친 곳이었는데, 다시 왔을 때는 누스와 그의 아내(또이)가 있었다. 라오스의 다른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남편은 꾀죄죄했고, 아내는 말끔 단정했다. 이곳을 택한 이유는 레스토랑을 겸하고 있기에 들어가 말을 걸기가 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누스에게 내일 데이 투어를 하고 싶다고 하자, 그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투어매니저가 자리에 없으니 30분 뒤에 오라고 했고, 옆에 있던 아내는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아저씨들의 이발소와 젊은이들의 이발소.

 

15분 뒤, 다시 찾아간 카페에 투어매니저로 보이는 사내(봉통, 38)가 와 있었다. 언뜻 배우 잭 니콜슨과 비슷한 인상의 그는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항아리평원과 스푼빌리지를 가고 싶다고 하자 그는 내가 알아 본 것보다 훨씬 비싼 금액을 불렀다. 7,8만 원선이면 될 줄 알았는데 11만원을 달란다. 내일 데이투어를 할 사람이 당신 혼자이기 때문에 차와 가이드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해야 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비싸도 너무 비싸다. 일단 알았다고 한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거래의 기술을 써보았다. 하지만 봉통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느긋한 표정으로 다녀보면 알겠지만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거라고 했다. 혼자 가는 것, 더 비싸게 가야 하는 상황,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항아리 평원을 볼 시간은 내일 하루 뿐. 오직 그것을 위해 오는데 하루, 가는데 하루의 시간을 들여 여기까지 왔다. 해는 이미 지고 있고, 어두워질수록 흥정은 어려워질 것이었다.     


결국 무장해제를 하고 다시 봉통 앞에 앉았다. 먹이를 포획하는데 성공한 봉통은 일사천리로 살을 바르기 시작했다. 영수증에 방문지와 시간, 가격을 적는 동안 조목조목 따져가며 전혀 비싼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다음 날 투어는 모든 것이 기대 이상이었다. 전용차와 전용 가이드. 한산한 항아리평원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둘러볼 수 있었고, 이동 중 몽족 가이드 ‘라(30)’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생각과 일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원하지 않는 ‘위스키 마을’을 건너뛰었고,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식당에서는 주인집 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가정식을 맛볼 수도 있었다. 어제만 해도 먹잇감이 되어 살이 발리는 기분이었는데, 투어를 돌다보니 오버된 비용 5만원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라’라는 이름은 ‘주니어’와 같은 의미로 몽족에게는 매우 흔한 이름이라고 했다. 불발탄을 녹여 숟가락을 만드는 스푼빌리지 마을의 원래 이름도 ‘라’ 마을이었다.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아르바이트로 가이드를 하고 있다는 라. 경비가 쪼들려 팁을 주지 못하는 대신, 점심을 사주고, 투어를 마친 후 밤비 레스토랑에서 음료수를 대접했다.       


따로 방이 없는 라오스 주택 실내구조. 항아리평원 site 1 에 있는 게릴라군의 동굴 은신처

Bombie's 레스토랑의 '누스' 스토리    


숙소에 돌아와 브런치에 ‘항아리평원 투어’ 글을 올리고 숙제를 마친 홀가분한 기분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길을 나서자마자 레스토랑 테라스에 앉아 있는 누스와 봉통과 또 한 명의 친구(완)을 만났다. 꼬치안주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 어땠냐는 인사를 주고받는 중에 자연스럽게 내 앞에도 맥주가 놓여졌다. 그날 밤, 그들은 내게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헤어질 때가 되어서는 꼭 다시 오라, 다시 오마 약속을 하며 포옹을 나눌 정도로 애틋한 사이가 되었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카페사장 누스였다. 평소 나른하고 멍한 인상의 그는 알고 보니 폰사반 명문가의 장남으로 이곳의 유지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베트남 전쟁 당시 호치민과 함께 싸운 폰사반 사회주의 단체의 지도자였고, 그의 아버지가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고 한다. 가게 안에 걸린 사진은 장식용이 아니라 실제 호치민과 그의 할아버지가 베트남 전쟁 중 찍은 사진이었다. 또 그의 동생은 외교부 직원으로 평양에서 7년 간 근무한 적이 있으며 현재는 모스크바에서 근무 중, 장남 누스가 고향에 남아 지역사회를 맡고 있었다.    

 

두 형제는 각각 이곳에서 벌어진 전쟁을 소재로 한 전쟁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전력이 있었다. 동생과 아버지는 베트남 전쟁 당시 CIA가 벌인 ‘비밀전쟁(secret war)'에 관한 미국TV용 다큐멘터리 <The Ravens: Covert War in Laos (2003)>(까마귀 : 라오스에서의 은밀한 전쟁)에, 누스는 미군의 라오스-베트남 접경지역 폭격으로 인해 남은 불발탄을 다룬 이탈리아 감독의 다큐 <The Remnants(2019)>(파편들)에 출연했다.     


호치민과 함께 한 누스의 할아버지 사진 과 동생이 출연한 다큐 포스터


취기가 오른 누스는 유튜브에서 자신이 출연한 작품의 트레일러를 찾아 보여주었다. 2014년부터 이탈리아 감독과 제작진과 4년 동안 촬영했다고 하는 이 작품. 알고 보니 <지뢰마을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올해 서울환경영화제에 초청상영 된 바 있으며, 6개국 이상의 다큐영화제에 출품상영 중인 따끈따끈한 작품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시앵쿠앙 지역에 가해진 폭격, 불발탄으로 인해 발생한 2만 2천명의 사상자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불발탄 제거작업에 대한 내용으로, 누스는 여기서 현지 주민을 대표하는 안내자로 출연했다. 화면 속 말쑥하게 차려입은 누스의 모습이 낯설기만 한가운데, 눈앞에 앉아 있는 헐렁한 사내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화면 속의 누스

그들 가족이 출연한 작품은 모두 라오스에서 벌어진 베트남 전쟁을 다룬 작품이었다. 도대체 그때 라오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뒤늦게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합석한 프랑스 청년 ‘유니스’도 그것을 궁금해 했다. 프랑스인 어머니와 알제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4개월 째 오토바이로 아시아를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다음날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물어보려다 자리를 함께하게 된 유니스가 물었다.      


“베트남 전쟁에 왜 라오스가 싸우게 된 거야?”     


누스는 묘한 표정으로 유니스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예 시작을 않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왜 그렇게 복잡할 수밖에 없었는지...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다른 나라 사람도 아닌 프랑스인이 할 질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라오스와 프랑스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기 전, 라오스는 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태국과 라오스의 국경은 메콩강, 라오스와 베트남의 국경은 고산지대로 라오스는 베트남보다 태국과 자주 충돌해 왔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은 후 태국에게 메콩강 동쪽을 넘길 것을 요구했고, 태국은 라오스를 순순히 프랑스에게 넘겼다. 아래에서는 영국, 옆에서는 프랑스의 위협을 받고 있던 태국은 납작 엎드리며 식민지를 면했다.   

 

프랑스가 라오스에서 빼먹을 게 없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다도 없고, 사방 97%의 산지에 둘러싸인 라오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농사는 물론 교통에 있어 최악의 환경을 가진 곳이었다. 이에 프랑스는 산을 개간해 아편을 경작할 것을 적극 권장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었다.   

  

1945년 일본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를 몰아내자 라오스는 잠시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해 일본이 항복을 하자 프랑스가 돌아와 자신들의 식민지를 재차 점령한다. 일반적으로 유럽국가 중 가장 악질적인 식민지 제국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꼽는데, 그 중에서도 프랑스를 더 악질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들이 2차 대전 이후는 물론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식민지에 집착해 왔기 때문이다. 프랑스인의 기질 자체가 집착이 강한 것도 있을 테고, 아메리카를 먹음으로써 자신들의 언어를 세계 공용어로 만든 영국에 대한 프랑코포니(프랑스어사용국)의 콤플렉스도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라오스의 독립과 사회주의 정권 수립에 지대한 기여를 한 것이 프랑스라는 사실이다. 일본에게 패한 프랑스가 라오스의 독립운동을 뒤에서 적극 지원했기 때문이다. 이때 조직된 독립운동 세력이 결국 ‘파테트 라오’라는 사회주의 정치단체로 발전하였고, 그들은 재차 식민지배에 돌입한 프랑스에 대항해 싸우게 된다. 그리고 프랑스가 베트남에게 패하고 물러가면서 라오스도 동시에 독립을 쟁취했다.   

  

독립 이후 라오스의 권력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왕정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인 파테트라오, 그리고 소수의 중도세력으로 삼분된다. 왕정세력은 외국에서 받은 원조로 자기들끼리 흥청망청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파테트라오는 호치민의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뛰어들었다. 결국 전쟁에 승리한 베트남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라오스에서도 큰 충돌 없이 파테트라오의 '라오스인민혁명당'이 들어섰고, 그들은 오늘날까지 계속 집권을 이어오고 있다.    

 

요컨대 라오스의 역사는 전통적으로는 태국과의 갈등이 심했고, 프랑스 식민통치 이후 베트남의 정세에 따라 변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근현대 라오스 역사의 주역이자 베트남 전쟁 참전의 주인공인 파테트라오를 탄생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프랑스였다. 이것이 “도대체 왜 라오스가 베트남 전쟁에 엮이게 되었는가?”하는 프랑스 청년 유니스의 해맑은 질문에 누스의 표정이 그렇게 복잡 미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으리라. 더구나 유니스의 아버지는 알제리 인이었으니...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 질문이라 하겠다.     


비엔티엔의 '파테트 라오' 군

CIA 비밀전쟁(Secret War) 과 <그랜 토리노>    


라오스의 파테트라오는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베트남전에 가담했다. 베트남전에서 라오스의 가장 큰 역할은 보급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의 손이 미치지 않는 라오스와의 접경 산악 밀림을 통해 군사물자와 보급품을 날랐다. 그들은 미군의 손이 닫지 않는 험하고 좁은 산길을 따라 자전거와 수레, 등짐으로 무기와 포탄을 운반했고, 게릴라군의 신병 훈련소도 접경 산중에 두었다.


라오스와 베트남의 접경 산악 밀림의 보급로. 이것이 ‘호치민루트 (Ho Chi Min Trail)’이다. 라오스의 지원군은 그 은신처이자 보급로를 호위하는 첨병이었다. 그곳은 미군에게 가장 골치 아픈 지역일 수 밖에 없었다.   

 

라오스 전역에 걸쳐 있는 '호치민 루트 Ho Chi Min Trail'

호치민루트에 대해 미군은 두 가지 작전을 구사했다. 하나는 고산 소수민족인 ‘몽족’을 포섭, 지형에 밝은 그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자신들 대신 싸우게 하는 것이었다. CIA가 주도한 이 작전은 사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자주 써오던 전략 중 하나였다. 같은 방식으로 프랑스는 알제리의 카빌리 족을 포섭했고, 영국은 중동의 베두인과 아프간 미족과 유대인을 포섭했다. 그들은 언제나 시민권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으로 소수민족을 꼬득인 후, 전후에는 하나같이 나 몰라라 도망을 쳤다. 자국에 남겨진 소수민족들은 매국노로 낙인찍힌 채 대대로 천대를 받거나, 지배국의 불법이민자가 되거나, 무장을 하고 다른민족과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다급해진 미군은 앞서간 제국주의의 못된 작전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산중으로 CIA를 투입, 몽족을 포섭하고, 1200M에 달하는 비행장을 짓고, 군사훈련소를 만들었다. 조건은 물자 및 무기제공과 전후 신분 보장. 남녀노소 3만 명의 몽족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전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마을 앞길을 지나는 북베트남군의 보급부대를 습격하는 한편 미군 포로를 구출하는데 투입되었다. 그 과정에서 몽족 군인 1만 8천명이 전사했고, 민간인 5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결국 미국은 전쟁에서 패했다. 그리고 그들 또한 몽족을 버렸다. 종전 직후 미국은 몽족전사 사령관인 ‘방파오’를 비롯한 소수만을 망명객으로 받아들였고, 나머지는 사회주의 정부의 탄압을 피해 태국등지로 탈출해 난민이 되거나,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쥐를 잡아먹으며 살아야 했다. 그들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들쥐고기를 좋아했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산길에서 만난 몽족

그나마 미국은 국제사회를 의식해 몽족 난민들을 꾸준히 받아들여 왔고, 현재는 망명객과 그들의 후손 30만 명이 아메리칸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영화 <그랜 토리노>에 등장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선량한 이웃사촌과 갱단이 바로 그들. 몽족의 기구한 사연을 알고 영화를 돌이켜보면 이 영화가 한층 의미심장하다. 조용한 말년을 보내고자 했던 참전용사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다시금 그들의 분쟁에 개입하는 한편, 지난 역사의 과오를 자기희생으로 책임진다...는 그야말로 미국적 보수주의의 끝을 보여주는 작품인 것이다. 한편 미국은 베트남과 국교 정상화를 하며 일종의 선물로 미국에 살고 있던 몽족전사 사령관 ‘방파오’를 국제범죄혐의로 구속수감하기도 했다.   

   

호치민루트와 시앵쿠앙 폭격    


호치민루트를 봉쇄하기 위한 미군의 또 하나의 작전은 대규모 폭격이었다. 미군 전투기들은 부대로 돌아가기 전 남은 폭탄을 모두 이 산악지역에 버리듯 쏟아 부었다고 한다. 폰사반이 자리한 시앵쿠앙 지역에만 물경 2만 톤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그 결과 오래 전부터 독립왕국이 있던 이 지역은 나무하나 없는 고원 황무지가 되었다. 역사도, 왕국도, 마을도 흔적 없이 사라졌고, 수많은 불발탄이 묻혀 있어 다시 마을을 지을 수도 없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제작한 폭격지도


살아남은 주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불발탄 탄피를 녹여 숟가락을 만들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폭발사고로 인해 2만 2천명이 죽거나 다쳤다.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은 불발탄 제거 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관광객은 안전이 확인된 지역을 절대 벗어나면 안 된다.     


하지만 폭격은 이곳만의 경이로운 풍경을 낳기도 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 깊은 땅 속에 묻혀 있던 고대의 돌 항아리 수 천 개가 땅 위로 솟아올랐다.  3천 년 전 모습 그대로 인 것, 폭격에 맞아 깨진 것, 열대림의 뿌리에 잡아먹힌 것이 지난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채 널려 있고,  그 옆에는 폭탄이 터지며 남긴 커다란 구덩이들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60년이 지난 지금 황무지는 알아서 다시 숲이 되었다. 목숨을 건 개간과 불발탄 제거를 통해 목장이 되고, 논밭이 되고 마을이 되었다. 항아리 평원이 워낙 압도적인 풍경을 보여주기에 다른 곳을 둘러 볼 생각을 못해서 그렇지 이곳에는 라오스에 가장 높은 산도 있고, 광활한 국립공원도 있고, 폐허가 된 므앙쿤 왕국의 유적도 있고, 온천도 있고, 폭포도 있다고 한다. 목장은 대부분 베트남-라오스-일본의 투자를 받아 100% 오가닉 농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누스와 봉통은 밤늦도록 나에게 폰사반을 알리고자 애를 썼다. 항아리 평원이 개방하는 곳은 3군데이지만 60여 개 사이트가 더 있다는 얘기, 그중에는 새 모양의 사람 조각이 있는 것도 있다는 얘기, 물의 온도가 산에서 아래로 내려 갈수록 차가워진다는 얘기, 고원이기 때문에 라오스의 그 어느 곳보다 날씨가 좋고 공기가 맑다는 얘기, 둘 다 이혼을 했다는 얘기, 봉통은 가수가 꿈이었고 지금도 종종 마을 행사에 나가 노래를 부른다는 얘기, 누스의 아들과 딸은 어머니가 다르다는 얘기, 그리고 낮에 몽족 청년 ‘라’가 쏟아낸 또 다른 얘기들... 어떻게 다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맴돈다.    

   

밤이 깊어지자 누스는 테이블을 밖으로 옮기고 가게 문을 닫았다. 철망으로 된 가게 문 안에는 아내 또이와 딸이 간이침대에 누워 누스의 술자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누스는 그들이 어제도 감옥에 갇혀있었다며 농담을 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또이는 졸린 눈으로 베시시 웃었다. 가족들이 기다리거나 말거나 누스는 어제 손님이 선물로 주고 갔다는 도미니카산 프리미엄 시가를 꺼내 돌렸고, 그 사이 고등학생인 누스의 큰 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누스는 해맑은 프랑스 청년 유니스에게 공사구간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짚어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내일 여기에 남아 같이 낚시를 가자고 유혹했다. 봉통도 내일 관광객에게 개방되지 않는 항아리 평원을 보여줄 테니 하루만 더 있다가라고 졸랐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내일 새벽 버스는 떠날 것이었다.

아... 왜 항상 마지막 날 천사들을 만나게 되는 걸까.

결국 이번에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그들과 헤어졌다.

폰사반은 그렇게 내가 또 다시 가볼만 한 곳, 가야만 할 곳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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