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갈라질때 생겨난 세계에서 가장깊은 호수, 부랴트족의 성스러운 바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들이 몇백 마일을 달려 호수에 누워 별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굳이 세상 추운 겨울 바이칼호수 여행을 계획한 것도 사실은 이와 무관치 않았다. 인상깊은 장면이 뇌리에 박혀 ‘바이칼 호수에 누워 별 보기’가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
인천에서 이르쿠츠크까지는 대한항공과 아에로플로트가, 시베리아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공동운항편을 운행한다. 이밖에 중국이나 몽골 등을 경유하는 비행편도 있지만 가격 차이가 크지 않아 비추.
바이칼호수는 이르쿠츠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그리 멀지 않아 이동하기 편하고, 깊이 얼어 안전한 리스트뱐카로 향했다. 이르쿠르크에 도착하는 비행편은 대부분 밤에 도착하기 때문에 이동편에 대한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가로등도 없고 길 양옆으로 눈이 수북히 쌓인 도로를 택시 드라이버는 100km가 넘게 밟아댔다. 러시아 운전자들은 혹독한 면허 시험을 통과한다. 모스크바의 교통 지옥, 블랙아이스가 깔린 겨울의 도로를 감당하려면 이정도는 필수다. 무시무시한 얼음길을 한시간여 내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너무 추우면 바람이 따갑다. 아이슬란드와 발트 3국,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많은 겨울 여행을 했지만 바이칼호수의 살을 에는 바람은 ‘역시 시베리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다만 그만큼 아름답다. 산소 함량이 높아 푸르게 빛나는 호수의 얼음과 몇 십 센티미터 아래 출렁이는 맑은 물살. 어디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다.
얼음 위를 내달리는 히부스를 타면 보다 멀리 갈 수 있다. 바이칼호수에 있는 민물고기인 ‘오물’을 잡으려 얼음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군데군데 보인다. 우리는 영어를 쓰는 러시안 가이드와 미국에서 온 여행자와 동행했다. 두껍게 얼은 호수 사이로 얇은 얼음층이 있어 혼자 걸어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가이드가 주의를 줬다. 히부스를 운전하는 드라이버는 내가 계속 미끄러지자 우리에게 아이젠을 빌려주기도 했다.
바이칼호수를 주행하다보면 호수가를 따라 철도길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엄청난 공사비가 투입돼 ‘황금 허리띠’라고도 불리는 이 옛 철도길은 옛 슬라브인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건설됐다. 바위를 깨 노반을 놓고, 터널을 뚫고, 역을 만들고, 다리를 건설하는 등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공사에 투입됐다. 유배자와 죄수들도 동원됐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공사 현장 사진에 상투 튼 사람들도 목격됐다는 것을 보아 조선인들도 공사에 참여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어쨌든 여러 형태의 터널과 다리들은 1세기 전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절벽을 잇고 산등성이를 뚫었다.
리스트뱐카에서는 두 가지를 추천한다. ‘물범’, 그리고 ‘오물’.
바이칼호수에는 수많은 생물들이 사는데 그 중 하나가 물범이다. 바이칼물범은 현지어로 Nerpa(네르빠)라고도 불리는데 다른 물범에 비해 아담하고 강아지를 닮은 것이 특징이다. 민물에서만 살아가는 유일한 물범으로 알려져 있다.
리스트뱐카에서는 물범쇼가 성행한다. 매 시간 30분 가량 진행되며 러시아어로만 제공되지만 쇼 특성상 알아듣지 못해도 재밌게 즐길 수 있다.
시장에서도 식당에서도 이 오물 요리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
대부분 맛있다는 평가인데 내가 먹은 오물 수프는 비린내가 심했다. 민물고기라 아무래도 어느정도의 비린내는 감수해야 할 것 같다. 수프보다는 구이를 추천.
해질녘이 되고 하늘에 금성이 뜨면 호수에도 인적이 끊긴다. 바람도 세게 불고 체감온도가 뚝 떨어져 식당들도 일찍 문을 닫는 분위기.
별을 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호텔 문을 나섰다. 주인에게 “나 지금 별 보러 가니까 새벽에 호텔 문 잠그지 말아달라”고 하니 거듭 당부의 말을 건넨다. 걸어서 멀리 가지 말 것, 한 자리에 오래 있지 말 것. 실제로 밤에 나갔다가 호수에 빠져 죽은 관광객들도 많다고 한다.
무시무시한 경고를 뒤로 하고 호텔을 나섰다. 막상 호수에 도착하니 바람 소리에 섞여 쩍 쩍 하는 얼음 갈라지는 둔탁한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려 멀리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로등을 등지고 최대한 광원이 없는 곳을 골라 삼각대를 설치했다. 처음 찍어본 일주사진인데 초점이 잘 맞았는지 별이 아주 많이 나왔다.
별을 본다면, 혹은 별 사진을 찍는다면 보름 전후는 피하는 것이 좋다. 달빛이 너무 밝아 별들이 묻히기 때문이다. 겨울철 별자리인 오리온자리와 마차부자리, 큰곰자리, 플레이아데스 성단, 카펠라까지 뚜렷했으나 별이 너무 많아 오히려 별자리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쏟아질 듯한 별빛 아래서 앞으로도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씩 찾아나갈 것을 다짐했다. 처음과 지금, 수많은 시간이 흘렀고 내 모습도 상황도 많이 변했지만 분명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고 나는 그것을 지켜갈 것이라고. 마치 나를 위해 빛나고 있는 듯한 바이칼호수의 밤이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