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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 Dec 25. 2020

다짐

2/29





집안에 슬픔이 만연하다.

내가 그 슬픔을 몰고 왔다.

두고두고 죄스러울 것이다.

지워도 지워도 남아있는 얼룩처럼.




나의 시모는 친정 부모와 시동생 내외가 동석한 자리에서 나에게 출가외인이라고 했고, 친정과 시댁의 의견이 다를 때는 시댁 말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나의 시부는 공개된 장소인 커피숍에서 내가 다 잘해서 말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다 참아서 말 안 하는 것이라고 했다. 네 남편도 화가 아주 많이 나 있으며 그는 화나면 무서운 사람이니 네가 조심해야 할 거라고 했다. 나는 얼른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에 머리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상황이 이렇게 안 좋아진데 대해 어른들께 죄송한 내 진심이었다. 나아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렇게 끔찍했던 시간은 일단락되었다.


그들이 휩쓸고 지난 자리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에게 나로 인해 상처 받았다. 오늘 나는 내 부모의 약점이었고 무방비상태로 공격당했다. 나는 아마도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끔찍했던 상황을 함께했던 나의 부모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는 죄송해서 울었고 엄마는 내가 안쓰러워 울었다. 당신이 당한 게 아파서가 아니라 그런 시댁을 상대로 살아야 하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내 미래에 울었다. 행복하리라 생각하며 직접 결혼식에서 축사했던 당신의 딸이 고작 일 년 지나 행복이 없는 미래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절망했다.


아빠는 눈물로 울지 않아도 그보다 깊게 침잠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닫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과 질문이 그득 담겨 있었다.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답이 당신을 더 아프게 할 것이었다. 나의 미래에는 희망이 없음을 확인시켜 줄 것이었다. 그래서 같이 침묵했다.


친정에 있는 동안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며 평소처럼 웃기도 했지만,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순간 뒤에는 간간히 눈가가 젖어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8개월 아기는 우리에게 찰나의 웃음들을 주었고, 동시에 그런 아이의 천진함이 우리를 더 깊게 슬프게 했다. 그날의 기억을 계속 떠오르게 했다.


그 날이 끔찍하지 않았던 나의 남편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면 왜 자기와 결혼했느냐고 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냉정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려 한다. 그게 혹여, 모두가 함께 하는 미래가 아닐지라도. 어떤 역할을 버리고 또 어떤 역할을 취할지 독하게 고민할 것이다. 나와 내 아이의 내일을 위해서.





지난 2월 29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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