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 사랑의 마음
책을 읽고 운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마저도 눈물이 핑 도는 정도였고, 이렇게 펑펑 울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내내 생각했다.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이 어떻든, 그보다는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주는 사랑을 정직하게 받고 주었을 그의 지난 삶을 짐작해 보게 된다. 이 책을 쓴 고명재 작가는 시인이다. 시를 쓰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그의 산문도 시를 닮아 있었다.
대체로 스님들은 기약하거나, 함부로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스님들은 말없이 사랑하고 말없이 죽는다. 불가에서 사랑은 그렇게 기척 없다. 쑥을 캐거나 좌복을 펼치듯 단정하게,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듯이. 사랑을 사랑 자체로 발휘하는 것. 그러고 그들은 미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고요히 사랑을 주다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붙잡지 않고 우리는 사랑을 해냈다. 엄청난 고통과 불치병을 몸에 달고도 수십 년 사랑이 사랑을 발휘했다. 그렇게 젊은 비구니가 나를 키웠다....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
시인은 어렸을 적 절에 자주 다니며, 비구니 사이에서 컸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그의 글에는 불교 특유의 초월, 평온, 고요함이 자주 묻어있다. 그가 쓰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밸런타인 데이 초콜릿 같은 분홍, 노랑, 빨강의 색채가 아닌 스님의 승복과 같은 무채색이다. 희고 검은, 그러나 고요하고 잔잔하게 곁에 머무는 그런 사랑. 공식적으로는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이지만, 사실상 불교에 더 마음을 두고 의지하는 나여서 이 책에 더 마음이 갔을 수도 있겠다.
지금껏 사랑은 불타오르는 뜨겁고 화려한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을 겉으로 내보이고, 티를 내고, 사랑의 대상을 위해 헌신하고, 모두가 알 수 있게 하는 것. 특히나 일에 대한 사랑이 그랬다. 내가 이만큼 책을 사랑한다고, 내가 이런 일을 했다고 모두에게 나의 애정과 사랑을 고백해야만 만족할 것만 같았고 행복할 것만 같았다. 일에 골몰하고 매달리기, 쉬는 주말에도 일 생각을 하기, 놀러 나가서도 직업병처럼 영감을 얻어오는 일에 집중하기. 이게 일을 사랑하는 나의 방식이고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국 나는 '내 일을 사랑하는 나'의 이미지에 빠져있었을 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계발서에서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런 식의 일에 대한 사랑은 알고보니 내 성향과 맞지 않는 일이었고 결국 나를 옥죄어 오히려 내가 일터에서 큰 상처를 받는 원인이 되고야 말았다. 일에 대한 사랑에 집착하다 그 안에 갇혀버렸다. 주체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나 자신을 평가해 왔지만, 사실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 속의 이 세 페이지가 나의 마음을 다잡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지나친 자의식과 자기 연민을 뺴는 것에도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나도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구나 생각한다. 그저 자기만족으로 일을 했던 것이 아닌지, 그 만족을 위해 일을 제외한 내 일상을 너무 내팽개쳤던 것은 아닌지. 일 말고도 가족, 친구, 애인, 취미, 창작, 집, 여행 등 내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너무나도 많은데 내가 그에 대한 사랑을 너무나 홀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랑이든 과하면 독이 되는 법. 소위 '워라밸'이라고 불리는 그 균형이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워라밸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이렇게 가슴 절절히 깨닫지는 못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일과 적당한 거리를 두기. 모두가 말하는 뻔한 것이지만 정말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일을 사랑하며 꾸준히 지속하려면 오히려 그와의 거리를 둬야 한다. 가까이서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만이 사랑의 방식이 아니다. 바람이 통할 만큼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 쾌적할 정도의 사이를 유지하며 선을 넘지 않는 것. 어쩌면 무미건조해 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랑의 마음가짐이 나를 위해서도, 대상을 위해서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