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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송이 Nov 04. 2019

나를 무너뜨린 그 한 마디

고작 일곱 글자, 그 한 마디에 나는 무너졌다. 

"혹시 예약할 수 있을까요...?"


회사에서 일을 하던 중 복도로 나와 메모장에 적어뒀던 정신과 병원 전화번호를 핸드폰 자판에 꾹꾹 눌렀다. 평소 예약이 꽉 차 있어 진료 스케줄을 잡기 어렵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는 직원의 한 마디 뒤에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다. 속이 바짝바짝 말랐다. 당시 나는 그 몇 초 간의 정적도 견디지 못할 만큼 온통 너덜너덜해져 있는 상태였다. 


잠시 후 2달 후에나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안되는데. 나는 다급하게 지인 찬스를 들이밀었다. 그 병원을 내게 추천해준 지인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대면 예약을 좀 더 앞당길 수 있다는 나름의 꿀팁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인의 소개로 연락 드렸는데 혹시 어떻게 안 되겠냐는 내 비굴한 물음에 직원이 되물었다. "많이 급하세요?" 


그렇게 나는 2달 후가 아닌 2주 후 병원을 찾았다. 


사실 상담을 받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나는 대학생 때 약 1년 동안 매주 한 번씩 학교 내에 있는 상담 센터를 다닌 경험이 있다. 그래서 병원에 가기로 결심한 것도, 병원으로 가는 길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병원 문 앞에 서니 기분이 이상했다. 문 위에 선명하게 써 있는 '정신과'라는 글자. 그건 '상담 센터'와는 달리 어딘가 퉁명스럽고 딱딱한 느낌이었다. 그 글자가 괜히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하,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나. 문 앞에 서서 행여나 누가 나를 볼까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병원 앞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누군가 나타나기 전에 서둘러 자동문 버튼을 누르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병원은 생각보다 작았고, 예상대로 조용했다. 카운터로 가 전화로만 얘기를 나눴던 직원에게 이름을 얘기했다. 그런데 직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혹시 '이 사람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정신과에 왔지?' 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진 않을까. 하지만 나를 향한 그녀의 따뜻한 미소를 보는 순간 그건 정말 찐따 같은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덕분에 긴장으로 딱딱해졌던 마음이 조금은 말랑해졌다.  


병원비를 결제하고 쇼파에 앉아 진료실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며 차분히 생각했다. 최근에 나에게 닥친 일, 그로 인한 지금 내 상태, 내가 이곳에 오기로 한 이유. 몇 년 전 그때처럼 매번 두서 없이 지난 기억들을 마구 쏟아내며 코 푸는 소리로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할말들을 몇 번이고 정리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여기까지 안 와도 됐었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괜찮아지는 거였다. 이 정도라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뜻밖의 근자감을 안고 진료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의자에 앉은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괴로워서도, 병원을 찾게 된 내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고 초라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됐는지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선생님이 가장 먼저 건넨 '고생 많으셨어요', 그 한 마디 때문이었다. 괜찮은 줄만 알았던, 아니 괜찮은 거라고 믿고 싶어 꾹꾹 눌러담았던 마음의 조각들이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는 그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와르르 무너져내린 것이다. 폐허가 되어버린 마음을 안고 매일을 힘겹게 버티던 나에게 그 말은 너무나도 많은 의미였다. 그렇구나, 나 진짜 고생 많았구나. 그렇게 나는 몇 년 전 그때와 단 1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연신 테이블 위에 축축한 휴지를 쌓아나갔다. 


30분 간의 대화 후 다음 주 진료 예약을 잡고는 벌게진 눈으로 병원을 나섰다. 건물 밖을 나오자 튀김 냄새가 진동하는 길거리 포장마차와 바로 앞 대형 옷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 누군가와 함께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 번에 들이닥쳤다. 그 어지러운 색색의 풍경을 홀로 무채색으로 걷는 길은 여전히 외로웠다. 


하지만 어쩐지 그저 외롭지만은 않았다. 한 줌의 빛도 없는 지옥을 끝없이 걷던 내 마음을 인정해주고 들여다봐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그리고 매주 한 번씩은 어딘가에 나의 짐을 내려놓을 곳이 생겼다는 게 내 마음 한 구석을 조금씩 채워갔다. 그렇게 깜깜했던 나의 지옥 그 작은 틈새 어딘가로 아주 작은 빛이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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