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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오 Jul 06. 2020

열정과 여유의 시소게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면 안 돼

"조금만 더 일을 하는 게 어떻겠나? 아직 젊으니 회사에서 좋은 기회가 많이 있을 텐데."


 조그만 회사였기 때문에 몇 년 근무한 그냥 일반 직원 한 명이 이탈하는 것도 타격이 컸다. 경험도 경력도 없는 나를 일을 잘한다는 이유를 잡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회사 전체에서 막내였기 때문에 상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특히 게으르다거나 불성실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 입사를 하고 뭐든 열심히 했다. 출근도 가끔은 1시간이나 일찍 할 때도 있었고, 회사에서 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중요한 프로젝트에 끼거나 할 정도의 중요한 인재는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평판이 좋은 직원이 되었다.


"회사 그만두고 뭐할 거야?"

"멀~~~리 여행 갈려고요."

"어디로 가보려고? 일본? 베트남? 필리핀?"

"아니요. 터키 갑니다."


 큰 맘을 먹었다. 대학생 때 연수생으로 일본을 가봤지만 그보다 더 먼 곳으로 가보지는 못했다. 뭐 대단한 회사를 관둔 것도 아니고 모아둔 돈도 많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에 대한 보상이 크길 바랐기에 어중간한 곳은 싫었다. 축구를 보러 영국이나 스페인으로 가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번 여행지만큼은 터키가 무척이나 끌렸다.


"내일 몇 시 비행기야?"

"밤 9시 비행기라서 집에서 아침에 출발하면 돼요."


 1주일간의 터키 여행은 내 인생의 방향을 약간 비틀어주었다. 멀리 갔지만 혼자서 간 여행은 생각보다 그리 큰돈을 쓰지 않았고, 평생 기억에 남길만한 장면을 머리와 카메라에 수없이 저장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게 되었다. 새로운 도전을 이겨낸다면 물론 더욱 성장하겠지만 철저한 준비 없이 새롭기만 한 나의 도전은 시련만 가져다주었다. 물론 운이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1년을 넘게 준비한 오스트리아 취업기는 3달도 채우지 못하고 해고되었고, 자칫 하다간 불법 체류자가 될 판이었다.


"여기까지 온 비행기 값이 아까우니깐 유럽이라도 한 바퀴 돌고 와야겠다."


 어찌 되었든 유럽의 한 곳에 내리고 보니 멀게만 느껴졌던 파리, 뮌헨, 바르셀로나 등 유명한 도시들로 가는 길이 어렵지 않았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평생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유럽을 최대한 많이 경험하고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최대한 돈은 아끼면서 많이 걷고 많은 사람을 만나자라는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났다. 여행 계획 따위는 없었다. 휴대폰도 살리지 않았다.


 일단 비자 걱정은 없으니 교통수단이랑 숙소만 잘 선택하면 여행에 큰 무리가 없었다. 이동의 대부분은 버스를 탔고, 숙소는 게스트하우스를 가격순으로 정렬해 가장 저렴한 곳만 예약을 했다. 평점이나 위치 등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덕분에 버스를 17시간을 타기도 했고, 방 하나에 40명이 쓰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기도 했다.

오래된 버스는 17시간을 타는 여정이어도 5만 원이 넘지 않았고, 체코나 스페인의 작은 도시처럼 그나마 물가가 저렴한 곳의 숙소는 하루에 5천 원 정도로도 이용할 수 있었다.


"저는 부산에서 왔고, 비엔나에서 일하고 있어요. 휴가를 내고 여행 왔어요."

"오 저도 부산인데. 휴학하고 친구랑 왔어요."


 혼자서 보내는 시간도 많았지만 한국사람이나 외국사람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한국사람들을 모아 펍에서 같이 축구를 보기도 하고, 브라질이나 덴마크 국적의 친구들과 한 방을 쓰며 밤마다 맥주를 마시러 나가기도 했다. 영어를 제대로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지만 그들은 나를 불편해하지 않았다. 다만 비엔나에서 실패한 일은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돼? 오늘은 어디 갈 거야?"


 한국사람이든 외국사람이든 만나면 나는 이런 질문을 종종 했다. 아무 계획이 없던 내가 여행정보를 얻기 위함도 있었고,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어떤 여행을 추구하는 지도 궁금해서였다. 이런 질문을 할 때 한국사람들은 대부분 세세하게 계획되어 있어 몰랐던 여행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유럽이나 남미 등의 사람들은 당장 다음날의 계획도 말하지 못했다. 아니 계획이 없으니 말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스페인에서 같은 방을 쓰던 23살의 덴마크 청년은 아침 11시쯤 일어나 간단하게 커피를 한잔하고 롱보드만 하나 둘러메고 가까운 공원을 나갔다가 온다. 끽해야 3시간 남짓 놀다가 들어오는 게 하루 일정의 전부이다. 같은 유럽이라서 감흥이 없는가 싶어서 물어보았지만 그도 자기 나라를 떠나 여행을 한 것은 처음이라 스페인의 모든 곳이 새롭다고 말했다. 덩달아 나도 하루는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고 숙소 안에서만 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 물론 후회했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한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나는 정신상태 개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유럽 사람처럼 생각하고 살아야겠다 결심했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비교나 경쟁하지 않으며 나에 대해 잘 모르는 타인의 의견은 적당히 무시하고 살기로 했다. 정신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싶었다.


의지가 있고, 확고한 목표가 있으면 사람은 쉽게 바뀔 수 있었다. 


 나보다 어렸지만 미래에 대해 크게 불안해하지 않고, 현재를 즐길 줄 아는 다른 나라의 친구들이 부러웠기 때문에 철저히 유러피언으로 정신개조를 시작했다. 적어도 그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해 보였다. 시간에 쪼들려 새벽부터 일정을 시작하고, 쉬기 위해 온 여행에서마저 유명 관광지를 가지 못하고 돌아가면 안 된다는 한국사람들의 마인드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 역시 완벽히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니 나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고, 본래 한국사람처럼 부지런하게 살았지만 남들을 이기거나 인정받기 위해 행동하지는 않았다. 이전 회사에서는 동료나 상사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는 그저 내가 만족하기 위해 일을 했고, 예전처럼 애쓰지 않았지만 좋은 평가는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내 행동의 크기와 형태는 그대로였고, 행동의 방향만 바꿨는데 변화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나는 정신적으로 좀 더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었고, 인정받기 위해 애쓸 때와 비교해 나에 대한 평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몇 년간은 이런 삶이 정말 좋았고, 비록 실패였지만 유럽에서의 경험이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자부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런 삶도 몇 년 지나니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스트레스는 적게 받았고, 크게 화낼 일도 힘든 일도 없이 평탄한 삶을 지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럽에서 돌아온 후 몇 년을 뒤돌아보니 나는 아무런 발전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몇 년간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으니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밖에......


 누군가를 이기려고 하지 않았고, 아등바등 자격증을 따거나 업무에 대해 더 깊은 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회사나 사회에서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으니 굳이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할 뿐. 뒤로 가지 않았으나 앞으로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걸 느낀 나이가 이제 갓 30살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몇 년 사이에 자신의 자식들이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게 키우기 위해 자존심 죽여가며 자기 삶도 없이 아등바등 살며, 대학교 공부까지 마치고 이제야 한숨 돌리며 사는 부모들의 마음을 경험했다. 또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그들만큼 인생에서 모든 것을 불태웠는지, 벌써부터 젊음이 줄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놓아버릴 만큼 다 이뤘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정답은 No였지만 그렇다고 몇 년간 애써 만든 정신의 여유를 다시 망가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지금 시소의 가운데에서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 중이다. 한쪽에는 젊음에 걸맞은 열정의 무게를 유지하고, 반대쪽에는 정신적인 여유의 무게를 맞추기 위해 계속해서 추를 올렸다 내려놓는다. 훗날 나는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건강해지기 위해 열정이 올라타 있는 시소의 반대쪽에 올라탈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더 뜨겁게 불태울 수 있는 젊음이 주는 기회도 놓치지 않기 위해 시소게임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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