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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동하다 May 06. 2021

비오는 날엔 밀영,


하늘이 팔자 눈썹을 하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할 때면 

먹색과 회색빛이 섞여 얼룩덜룩해질 때면

소매 사이로 눅눅한 습기가 느껴질 때면

홀린 듯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있다.


그러다보니 

이곳을 올 때마다 비가 온 것인지

비가 올 때마다 이곳을 찾은 것인지

어느 순간 징크스인지 습관인지 헷갈리는 수준에 이르렀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 종점에 위치한 

건물 2층의 작은 카페 소월길, 밀영이다. 


작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폭이 50cm 정도로 좁은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 바로 앞에는 책장이 보이고 고개를 돌면 

주인장이 머무는 작은 주방이 있고 그 앞에 베이커리류가 있는 진열대가 있다. 

총 20평이 될까말까한 그곳엔 최대 다섯팀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다. 

혼자만의 서재처럼 앉을 수 있는 자리, 

마주보고 앉는 자리 두 개 

창가쪽으로 가면 

나란히 앉는 자리와 

마주 보고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

이 좁은 공간은 늘 많은 사랑을 받아 

절반 이상이 차있지만 

다행히도 늘 소외되지 않고 앉을 곳이 있었다. 

소월길 밀영의 서재형 1인석. 한나 아렌트를 다룬 책이 많았다.  /봄동하다


주인장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는데 

구획된 벽마다 섬세하게 분류된 서가 때문이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어

그가 어떤 분인지는 미지의 영역에 남겨두기로 했다. 

 

끌리는 책이 있어 펴보면 얇은 포스트잇이 곳곳에 붙어 있다. 

주인장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시작되는 문장 바로 위 여백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스타일이구나. 

좋은 문장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여유를 두는 스타일이구나, 짐작했다. 


누군가가 정성스레 포스트잇을 붙이며 읽은 책을 읽을 기회를 얻는다는 건 따뜻한 일이다. /봄동하다


구움과자와 케이크 서너 종류가 동시에 있는 곳. 

커피와 정성스럽게 내린 백차와 밀키우롱티가 공존하는 곳. 

건강을 위한 호박식혜까지도 있다. 


그곳에는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한 카페에 가면 

늘 함께하는 연속 사진의 셔터 소리도 없다. 

카페의 기분 좋은 백색 소음이 

커다란 하나의 소음으로 바뀔 때가 나에겐 

끊일 듯 끊이지 않는 연사 셔터 소리다. 


가끔 끊임없이 연속 셔텨를 누르면서도 

민망해하지 않은 사람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나와 사람들의 상식차를 절감하게 된다. 


비가 올 때마다 그곳으로 가는 이유는 

작은 난로가 어울릴 만한 아늑함도 있지만

그곳에 앉아 커피타임을 신청할 수 있도록

지척에서 일하는 지인 K가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작은 교차로를 돌아 파란색 202번을 타고 귀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행선지가 후암동 종점인 사람들. 


후암동 종점 앞 작은 교차로가 가까이서 내려다 보인다. /봄동하다 

비가 오는 날의 

분주함 

맥진함

피로

간혹 설렘, 

그 모든 것을 

비닐봉다리 속 수입 맥주 네 캔을 담듯이 

고이 담아 

귀가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보러 

난 후암동 종점이 보이는

소월길, 밀영으로 간다

다행히 영업 시간은 밤 9시 반까지다. 


후암동 종점에 내린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이 작은 조명이 보이는 것도 좋겠지 /봄동하다

운이 좋으면 

맛있는 차와 함께

그날 어울리는 책도 골라 읽을 수 있다. 


이번에는 

후암종점이라는 작은 이자카야를 보고

다음에 저곳에 자리가 난다면

혼맥을 하리라 생각하며 

아쉽게 귀가했다. 

늘 약속이 많은 지인 K와 함께하는 것도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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