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일 Dec 23. 2021

회복


그 사람 같은 작가가 되고 싶었다.

 여느 날처럼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이어폰을 꽂은 채 무작정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의 표지가 내 취향이었고, 책의 첫 에피소드를 읽고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반가움과 안도감, 위로와 슬픔 등이 섞여 나왔다. 귀에는 마침 sigur ros의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그 해 10월 처음으로 필름 카메라를 샀다. 어디를 가도 그 책과 함께 했고 어떻게 하면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학생이던 내게 디지털카메라는 너무 고가였고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페에 앉아 인터넷을 보다가 필름 카메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찍은 결과물을 바로 확인할 수 없고, 한 롤에 36장만 찍을 수 있으며 기종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자동 초점과 자동 노출 기능이 없다. 필름의 가격도 만만치 않고, 가격을 떠나 한 장 한 장이 소중하게 느껴지기에 사진을 찍기 위해 숨을 죽이고 천천히 노출과 초점을 맞춰가며 조심스레 셔터를 누른다.

 그런 필름 카메라의 매력에 빠져 필름 카메라를 샀다. 인터넷 중고 거래 카페에서 거래를 예약한 뒤 지하철을 타고 인천까지 갔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서 낡은 카메라 가방을 멘 체 나오시는 백발의 할아버지.

그는 40년 전에 이 카메라를 샀다고 한다. 손주에게 주려 했지만 이제는 줄 수가 없게 되어서 카메라를 내놓았다고 한다. 나는 카메라가 처음이었고, 할아버지는 내게 찍는 법을 아냐면서 천천히 하나씩 내게 가르쳐 주었다. 가운데에 있는 상이 하나가 되면 초점이 맞다. 레버를 끝까지 돌리면 찍을 준비가 된 거다. 셔터 속도는 가급적 1/60 아래로 두지 마라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내게 한 번도 말을 놓지 않았다.

 그날 이후 거리를 돌아다니며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대로 사진을 찍고, 그 사람처럼 내 이야기를 적어 내려갔다. 하나씩 쌓이는 사진과 글을 보며 스스로에게 위안이 되었다. 어느 날 인터넷에 올린 내 글에 그 사람이 댓글을 달아주었을 땐 참으로 기뻤다.


 사진을 찍지 않기 시작한 건 2년 정도 되었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도 무겁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이유로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 자연스레 거리를 걷다 멈춰 사진을 찍는 일도 줄어들었고 어느 날부턴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도 줄어들었다. 하는 일이 바빠지면서 사진을 찍고 싶어 나가는 휴일은 사라졌고 그 책은 책장에 꽂힌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최근 여러 일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메마른 줄 알았던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세 종류의 상실을 동시에 겪으면서 찾아오는 우울은 메말라 있던 내게 감당하기 너무도 힘들었고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이어폰을 꽂은 채 무작정 걸었다. 좋아하던 거리를 걷고 좋아하던 전시관을 가고 좋아하던 책을 꺼내 읽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끊임없이 들으며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며칠이 지나 조금씩 차분해지면서 그 사람의 책을 꺼내 읽었다. 나라는 사람은 변한 채 돌아갈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여전했다. 나는 또다시 위로를 받았고 혼자가 아님을 느꼈다. 이 사람처럼 되고 싶었다.


 카메라를 하나 샀다. 필름 카메라는 아니다. 주머니에도 들어가는 앙증맞은 카메라. 언제 어디를 가도 이 녀석을 들고 다니면서 조금 더 걷고 조금은 더 여유롭게 다니려 한다. 버스를 한정거장 일찍 내리거나 카메라를 들고 산책을 간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차곡차곡 모아 하루를 정리하고 좋아하는 사진을 꺼내 짧은 글을 써 내려가려 한다.

 오랜만에 찍은 사진은 서툴지만 그래도 괜찮다. 심장박동은 귀에 들리지 않고 식은땀은 더 이상 나지 않는다. 천천히 숨을 죽인 채 셔터를 누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 정거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