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왜 그런 거 있잖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거.
항상 그랬거든. 비 오는 날이면 들러 카푸치노를 마셨던 카페도, 홍대 프리버드도, 이태원 레코드샵도. 유년시절을 보낸 아파트 단지가 통째로 없어졌을 땐 쉽게 충격이 가질 않더라. 사람 만나는 것도 그랬어. ‘이 사람은 절대 날 떠나지 않을 거야’라며 믿어도 지금은 잘 지내는 지도 알지 못하잖아.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삼겹살집도 결국 사라지지 않을까?”
나는 아무 말 없이 잔에 따라진 술을 바라봤다.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믿어서인지 모르지. 그 사람에겐 부담을 줬을 테고 그래서 그 부담을 견디지 못해 갔을지도 모르는 거고. 그래서 이젠 믿지 않으려고. 차라리 믿지 않는다면 오히려 아프지도 않을 테니까.
그 이후로 계속 도망쳤어. 내가 이걸 시작하면 끝까지 할 수 있을까, 이번에도 꿈을 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이러면서. 그렇게 한참을 보내다가 침대에 누워 인스타를 봤는데 ‘극장판’이 사라진다는 거야. 기분이 진짜 이상하더라. 의식하며 믿은 건 아닌데, 이 공간이 사라질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거든. 공허할 때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곳. 늘 그 자리에서 대문이 열린 채 맞이해 주는 그런 곳이었으니까.
마지막 날 겨우 몸을 일으켜 이곳으로 향하는데, 유독 날이 덥더라. 이태원역에서 나와 언덕을 한참 오르고 이슬람 사원을 지나 우사단길을 따라 쭉 걷다가 주차되어 있는 차 사이 작은 골목으로 내려가면 숨어있는 까만 대문과 노랗게 쓰인 글씨. 그 앞에서 한참 멍하니 있다가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고 한 숨 내쉬고 들어갔어. 들어가기 전엔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거든. 사장님은 어떤 심정으로 계실까, 마지막 날이라며 온 지인분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계실까, 나로선 도저히 알지 못할 먹먹함과 아쉬움으로 슬픔에 잠겨 계실까. 그런데 문을 여니 내 예상과 전혀 다른 거야.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분위기. 사장님 특유의 말투로 인사를 건네고, 평소와 다름없이 표에 날짜를 적어 건네주고. 나는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런 걱정이 우습듯 사라지더라. 8석, 예전엔 6석뿐이던 작은 상영관에 들어서는데, 내가 너무 호들갑이었나 싶더라고. 슬픔보단 편안함이 다가왔어. 집에 온 듯 익숙한 그런. 영화도 꼭 그랬어. 사장님이 이곳을 지키며 있던 일상과 같은 모습들. 영화를 마치고 일어나니 이 공간이 사진을 찍듯 기억에 남더라. 사장님에게 겨우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나오니 하늘은 유독 파랗고 구름은 뭉게구름인 거 있지. 날이 참 더운데, 기분이 썩 괜찮았어.
5년이란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나 같은 사람도 왔다 가고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을 거 아냐. 다양한 일들도 있었을 테고, 환한 웃음도, 말 못 할 슬픔도 겪었겠지. 이런 공간을 열어주셔서 감사하다며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테고, 조금이라도 오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고민도 많이 했겠지.
그런 이 공간을 닫기로 마음먹었을 때, 또 우리에게 알릴 때 사장님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다.
“있지, 난 몰랐다. 항상 나한테서 무언가가 사라졌다고만 느끼고, 어린애처럼 칭얼대기만 했단 걸. 정작 그러고 싶지 않음에도 사라져야만 함을 결심하고 오랫동안 머물던 그 공간에서 떠나가는 그들이 어떤 마음일지 생각도 못했어. 그리고 그게 꼭, 아프거나 나쁘지만은 않을 거란 것도. 사장님은 웃고 있었어. 슬픔도 분명 담긴 미소였지만, 웃었어. 조용하게. 우사단길 그 작은 골목에 있던 ‘극장판’은 다신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어느 곳에선 새로운 곳이 생기고, 설렘과 걱정을 안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사장님은 언젠가 어느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된 거고. 설령 다른 형태라도 말이야.
이곳에 다녀오고 또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깨달았다. 내 불안과 걱정은 당연하단 걸. 이젠 두려워만 하지 않으려고. 끝내지 못하더라도, 또 사라지더라도 시작할 거야.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나의 시작으로 누군가를 위로해줄 수 있지도 않을까. 난 그들에게 위로를 받을 테고.”
그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본다.
“너한테 이 말을 건네는 것도 하나의 시작이야. 누군가한텐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나름 큰 용기를 냈거든. 고마워. 들어줘서. 그리고 미안해, 갑자기 연락해서.”
그는 내 손을 조용히 잡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뒷모습만 바라봤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는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 투명한 술잔에 비친 빛들이 조용히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