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성향이 다른 거니까."
커피잔에 맺힌 물방울이 제 무게를 못 견뎌 컵 가장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다가 표면에 더 이상 물방울이 맺히지 않을 즈음 a가 말했다. 나는 애써 덤덤한 척 천천히 고개를 들어 네 눈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빛까지는 차마 숨기진 못한 것 같다. a는 나를 잠깐 쳐다보곤 이내 커피잔에 시선을 내린 채 말을 이어갔다.
"친할수록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 내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고 내가 너를 대하는 태도나 감정이 사라지지 않게 나름 조절을 하는 거야 적당히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누군가에게 기대하거나 기대고 바라는 것이 계속 생기면 결국 남이 될 수밖에 없더라고."
말을 이어가기 전 a는 화재를 돌리듯 입을 다물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작게.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기대하지 않을 자신 있어서, 나를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카페에서는 겨울을 알리듯 캐롤이 한껏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음이 잘 안 되는 듯 북적이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음악소리, 음료를 만드는 소리가 섞여 카페 전체에 맴돌았다. a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곤 입을 열었다.
“나는 다른 숨김이나 속뜻이 있던 게 아니야. 그냥 친해졌다 생각했고 그 전엔 친해지려고 연락을 자주 하거나 노력을 한 거야. 이제 친한 친구니까 나를 애써 포장하거나 하지 않고 나대로 살아가는 거야.
네가 전에 어땠고 나를 어떻게 생각했고 그런 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난 지나면 별생각 없이 까먹으니까. 과거가 내게 크게 남진 않는다고. 그런데 오히려 최근에 너의 행동이 귀찮다고 느껴지더라.”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날카롭지 않게. 오히려 따듯하다고 느껴질 만큼 담담하게 내게 말했다. a의 태도에 흠칫 놀랐다. 고요한 눈빛, 옅은 미소. 그 모습에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다 정신을 차리곤 그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 내게 멀어지려 한다고 생각했어. 이제 더 이상 보지 않으려고."
말을 하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려 참을 수 없었다. 부끄러워 숨고 싶었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한 채 말을 이어갔다. a는 내게 괜찮다는 듯 웅크린 자세를 조금 열곤 내 눈을 응시했다.
“내가 오해를 한 거였구나. 나는 네가 어떤지 잘 알지 못하고 내가 본 모습으로만 너를 판단했으니까. 원래는 연락이 잘 되는 사람인데 멀어지려고 답을 안 한 거라 생각하고 혼자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의미를 집어넣거나 망상을 펼치면서. 한번 핀트가 어긋나니까 수습이 되질 않더라고. 나도 내가 너에게 하는 행동들이 자괴감이 들 정도로 싫은데 내가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를 만큼 멍청하게 굴더라. 이제 다 괜찮아졌다, 다른 건 참을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너에 대해선 미안함과 괴로움이 사라지질 않더라고. 그래서 꼭 보고 싶었어. 이번에 너를 보면 정말 나아질 것 같았으니까."
a는 내 말을 듣고는 자세를 고쳐 앉고 커피잔에 남은 액체를 빨대로 저으며 대답했다.
“나는 오히려 이번 너의 모습에 신뢰를 잃었지. 전에도 괜찮을 거라 하고 헤어졌는데 한 달이 지난 지금 다시 반복된 거니까. 네가 다음에 또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이 들지 않아.”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차분해졌다. 시끄러웠던 울림이 들려오지 않는다. 차를 한입 마시곤 a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너는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 근데 나는 이제 개운해. 네 이야기를 직접 들었으니까. 나도 네게 더 이상 바라거나 기대하는 게 있지 않거든. 애초에 그랬었던 건데 어느 순간 너에게 자꾸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고 그게 잘못된걸 이제야 알아챈 거니까. 그냥 성향이 다른 건데 말이야.”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어갔다.
"사실 네 말대로 네가 나를 남으로 생각했다면 오늘 나오지도 않았을 텐데,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나 진짜 바보네."
a는 웃으며 팔짱을 낀 채 내게 말했다.
“어때, 이제 답이 좀 됐어?”
“응. 이제 편안해졌어. 고마워."
카페의 음악이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수다를 떨고 내리는 커피의 향기가 스며들어 온다.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