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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lim Aug 22. 2022

아무튼 나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니콜라마티외)을 읽고

중학생이었던 주인공 앙토니가 사회인이 되어 살아가는 6년간의 이야기와 그의 가족들, 주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평소 소설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데다, 이런 과하게 현실적이고 염세적인 일상의 내용을 담은 600페이지짜리 책은 읽는 내내 고역이었다...


그들의 인생의 막막함이 마냥 타인의 것이라 여겨질 만큼 먼 것이 아니게 느껴져서 더 거부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는 늘 그렇듯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꿈을 꾸고, 헛된 꿈에 부풀어 젊음을 무기 삼아 크고 작은 실수들을 저지른다. 어리석은 젊음은 방패가 되어 주지 못하고, 큰 오점이 되어 누군가가 희생되기도 하고 그 희생자가 본인이 되기도 한다.

결국 어린 날 꾸었던 꿈은 다신 떠올리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만큼 부끄러워져 버리고, 벗어나고자 했지만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주저앉아 버린다.


그렇게 살다 자식을 낳고 똑같은 인생을 물려주고 결국 태어난 그 자리에서 죽는 삶. 그들은 남겨진 아이들이었고, 남겨진 아이들은 자라 또 아이들을 남기고 죽는다. 결국 시대와 문화 정도에 따라 형태만 달라질 뿐, 결국 동일한 메커니즘을 따라 흘러가고 복제되는 이런 인생~~~~~~~~~~~~~ 정말 염세적이다…

희망 따윈 없어… 영화 <기생충>이 생각났다.


이 책을 읽는 것이 힘들었던 것은, 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래도 희망이나 돌파구 따위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고, 언젠간 ‘회복’(어쩌면 회복할 좋은 과거의 것도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될 것이라고 발버둥 치는 내 얼굴에 검지 손가락을 좌우로 천천히 흔들며 비웃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 사실 인생이 그렇게까지 절망적이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희망적이지만도 않다. 이런 애매함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라는 것 같은데, 그 일상이 중립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작년까지 내게 지배적이었던 생각은 ‘자식을 낳고 싶지 않다.’ 였는데(전공 때문인지 자녀에 대한 고민이 어렸을 때부터도 많았다.), 이유는 인생은 고해라면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세상에 던져 놓는 것이 미안하기 때문이었다. (내 종교적 신념과는 상충된다.) 내 뒤에 남겨진 아이들이 너무나 가엽달까!


이렇게 얘기하면 세상 어두컴컴한 인생을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또 그건 아니다. 어제의 환멸 나던 일상에서 오늘은 환기 구멍을 찾을 테고, 다시 희망을 주울 테고, 그렇지만 당연히 좌절할 테고, 뭐 그러면서 어떻게든 삶을 그럭저럭 나은 방향으로 멱살 잡고 끌어가 영위할 테다. 


나는 아직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꿈꾸고 사랑하고 싶고, 자녀를 낳아 희망적으로 키우고 싶으며 그럭저럭 수동적인 삶이 아닌 능력을 갖추어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살고 싶다.


655p 스테프가 남긴 공허는 단연 물리적이었다. 가슴속, 뱃속에서 그녀의 냄새가 났다. 삶을 계속될 것이다. 그게 가장 힘들었다. 이러고도 삶이 계속된다니. 뭐 이러쿵저러쿵 결국 쫒던 것을 잃고 좌절이 될지라도 삶은 계속된다. 그게 가장 힘든 일이지만, 또 삶이 계속되니 다른 결말을 한 번 더 꿈꿀 수 있는 것도 아닌가 싶다.


어딘가에서 본 글인데, 일을 꼭 해야 하고 일의 기쁨을 운운하는 사람들은 일을 대신해도 될 만큼의 돈이 있어보지 못해서라고 한다. 일단 재산과 상관없이 사람은 노동을 해야 한다며 일의 보람을 늘 운운하는 나로서는 아주 많이 뜨끔했고… 엄청난 재산까진 아니어도 일을 꼭 열심히 할 필요 없을 만큼의 돈을 얼른 벌어서 전업주부로 살고 싶다고 한결같이 주장하는 남편이 조금 이해가 됐다.


최근 그동안 만나왔던 부류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접하게 되면서 인식의 변화가 생기고 있다.


돈, 재산에 목매며 노골적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비판적이지만(내가 그렇게 살고 싶진 않다는 뜻) 돈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많이 일반화되어 통용되고 수치화할 수 있는 가치라면, 그 가치를 끌어들이는 합법적이고 깨끗한 힘을 가진다는 것은 단지 장사치, 돈미새(돈에 미친 새끼…)로 치부할 수 있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20여 년의 시간 동안 사회복지에 푹 물들어 있는 내겐 부딪히는 가치들도 있다.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가 가속화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과도 함께 지내본 나는 어느 정도 가난에는 책임과 이유도 있음을 보았다.


가난하고 약자의 포지션에 있다고 해서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해서는 안 된다. 정말 누군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무조건 도와주면 된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게끔. 누군가에게 지원받고 도움받는 것이 당연하고, 그 도움으로 삶이 영위되며 타성에 젖어 버리면 노력하지 않는다. (오! 이 것이 바로 가스라이팅인가?!) 노력을 한다 해도 결국 그 자리에서 맴돌아 ‘남겨진 아이들’이 되고 남겨질 아이들을 낳는 비극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길을 새로 내야 한다. 부모세대의 무거운 삶의 짐을 답습하지 않으려면, ‘남겨지지 않으려면’ 서 있는 판을 내가 바꿔야 한다. 그러려면 새로운 판으로 가는 ‘길’을 내야 한다. 익숙한 길을 고집하면, 빙글빙글 그 자리를 맴돌 뿐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나도 이 책이 말하는 남겨진 아이들로 결국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꽤 길을 잘 내는 힘 있는 사람이어서 다른 판으로의 이동을 성공해 또 다른 남겨진 아이들에게 길을 내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힘 더하기’와 ‘힘 빼기’다. 이 말장난은 무엇이냐? 내가 가고자 하는 판을 설정하고 길을 내는 ‘힘 더하기’와, 익숙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힘 빼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또는 두 판을 오가는 다리를 만드는 것도 괜찮겠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판이 싫지 않기 때문이다. 두 판을 오가며 판을 넓히는 것도, 나만의 판을 만드는 새로운 방법일 수 있겠다.


남겨진 아이들 이야기하다가 판이네 길이네 하고 있는 게 좀 웃기긴 하다만, 요즘 머릿속에 떠도는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들과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생각들을 이렇게라도 버무려 기록해 보고자 주저리주저리 썼다.


아무튼 나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고(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두!) ‘남겨진 아이들’ 같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해 보이는 지칭에 포함되고 싶지 않다. 아무튼 그렇다.ㅋㅋㅋ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이 글이 이해가 되시는지… 좀 궁금해진다… 너무 의식의 흐름 그 잡채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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