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La Pianiste)
오래된 건물에 대한 로망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그들의 시간이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있는 그런 건물. 옛날 홍콩 영화에 나올법한 낡은 연립 주택이나 간판에 글씨가 다 날아가버린 1층짜리 가게처럼. 그들(건물은 엄연한 무생물이지만 왠지 이렇게 부르고 싶어 진다)과 내가 공유하는 사건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삶에 마치 나의 지분이 몇 퍼센트 정도는 있다는 듯이 까닭 모를 애정을 느끼곤 한다. 대학에 들어와 내가 가장 사랑하게 된 공간 역시 오래되고 노회한 건물이었다. 학교를 상징하는 대강당의 고전적이면서도 우아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외관으로 신입생들은 그곳에서 수업을 듣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학관이라 불리는 그곳은 학교에 즐비한 멋지고 세련된 건물에 비해 어쩐지 촌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옅은 베이지색으로 칠해진 학관은 별다른 구조적 특징 없는 네모난 모양이었다. 건물 외벽으로 난 창문은 이미 세월의 흔적이 농후했다. 건물 내부는 냉기가 돌았고 각 층을 연결하는 통로는 제멋대로였다. 1층에서 2층으로 가는 통로를 찾기까지 많이 헤맸다면 아마 사람들은 웃고 말 것이다. 어쨌든 학관은 1층에서 2층을 건너뛰고 3층으로 곧장 학생들을 데려다 놓는 미로 같은 장소였다. 그래도 난 학관이 좋았다. 학관이 간직해온, 그리고 앞으로 쌓아갈 역사에 나도 한 문장쯤은 남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3월의 서울은 아직 추웠다. 학관 창문 너머로 새하얀 목련이 날개를 펼칠 날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4년 내내 학관을 오가며 나는 수많은 프랑스 영화와 프랑스 문학을 접했다. 그때의 경험은 지금까지도 나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때, 아직 수능의 잔재가 채 날아가지 않은 머리로 받아들인 '예술'이라는 세계는 곧장 내 가슴으로, 머리로 날아와 깊숙이 박혔다. 학관에서 제일 처음 봤던 프랑스 영화는 충격 그 자체였다. 내가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Isabelle Ann Huppert)를 알게 된 날이기도 하다. 학관 3층 낡은 유리 창밖이 새봄의 달큼한 공기로 일렁이던 3월 중순의 어느 오후, 교수님께서는 무심하게도 이 영화를 틀어주셨다. 미하엘 하네케(Michael Haneke)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 전혀 아름답지도 애틋하지도 않은 오히려 기괴하고 기분마저 찝찝한 이 영화는 그때의 계절과 너무도 맞지 않는 분위기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단정한 머리와 옷차림,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꼼꼼함, 차가운 표정을 지닌 에리카(이자벨 위페르)는 유명 음악 학교의 피아노 교수다. 사람들은 엄격하고 이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에게 선뜻 다가가지 않는다. 그녀를 처음 본 사람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으리라. 에리카는 외로운 여자다. 그녀가 어떤 욕망을 가슴에 품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부드럽고 감성적인 면이 있기는 한 건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에리카는 자신을 향한 작은 손짓 혹은 몸짓 하나로도 속수무책 무너져버릴 여자라는 걸. 그런 위태로움이 시종일관 그녀를 맴돈다.
아니나 다를까. 잘생긴 외모에 음악적 재능까지 겸비한 공대생 월터의 등장은 에리카의 정돈된 삶을 흐트러놓기 시작한다. 이 어리고 당찬 청년은 또래 여자아이들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에리카에게 한눈에 반한다. 에리카는 그런 사랑고백이 너무도 낯설다. 마흔이 다 된 에리카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그녀들은 일반적이라 보기 어려운 비정상적 모녀 관계를 맺고 있다. 에리카의 엄마는 옷차림부터 귀가 시간까지 딸의 모든 것을 사사건건 간섭하며 아직도 에리카가 여섯 살짜리 소녀인 것처럼 마음대로 다룬다. 에리카도 만만치 않다. 엄마의 억압에 순응하면서도 화가 날 때는 엄마에게 함부로 따귀를 날리고 그녀의 머리를 쥐어 뜯기도 한다. 물론 그녀의 엄마도 똑같이 딸의 뺨을 때리고 머리를 쥐어뜯는다.
한참을 화면에 푹 빠져있던 친구가 한 마디 했다. 그냥 떠나버리면 될걸. 에리카는 엄마를 증오하지만 그 기괴한 울타리를 떠나지 못한다. 에리카는 썩어 문드러진 울타리 속에서 신기루 같은 안정감과 소속감을 찾아 헤매고 있다. 세상에 혼자 남을까 두려운 이들은 곁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좀먹는다는 걸 알아도 그를 떠날 수 없다. 혼자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나는 에리카가 좀 더 빨리 집을 떠났다면 덜 외로운 사람이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라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사랑하는지, 어떤 취향을 갖고 있으며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들여다볼 기회가 생기지 않았을까. 홀로 될 것이 겁나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매어두었던 에리카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가 없다. 그녀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 속박하는 엄마라는 존재가 그럴 기회를 완전히 봉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리카와 월터의 관계가 제대로 흘러갈 수 없음은 자명하다. 에리카는 자기를 몰랐다.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표현하는 게 불가능했다. 월터에게 사랑이랍시고 변태적인 행위들을 스스럼없이 요구하는 에리카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사랑한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러나 사실 에리카의 진짜 욕망은 그런 것이 아니었으리라. 결코 그런 형태의 사랑은 아니었을 테다. 마지막 장면은 어느 공연장. 에리카는 피아노 연주를 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그곳을 빠져나오며 자신의 쇄골 아래를 칼로 찔러버린다. 숨죽여 영화를 보던 나는 헉,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그렇게 자기를 고통으로 몰아넣고 에리카가 돌아간 곳은 어딜까? 감옥 같은 자신의 집일까. 그곳이 아니라면 에리카가 갈만한 곳이 대체 있기나 한 걸까?
미하엘 하네케(Michael Haneke) 감독의 이 영화는, 한 여자의 변태적인 성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평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는 한 여자의 심연, 그 깊은 쓸쓸함에 대한 영화다.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감정 불구의 여자.
욕망은 가슴속에 가득 차 오르는데,
분출할 방법을 알지 못해 스스로 파국을 맞이하는 여자.
교수님은 이 영화가 끝난 뒤,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수업을 마치셨다. 강의실을 나오며 친구들은 그저 에리카, 미치광이 같은 여자 에리카를 놀려댈 뿐이었다. 소름 끼치는 에리카, 과장하는 손짓으로 키득거리면서. 나도 혀를 내두르며 미친 여자 에리카를 비웃었다. 웃으며 걷고 있었지만 마음 한켠이 식어오는 걸 느꼈다. 나는 며칠이 지난 뒤 도서관에서 이 영화를 한 번 더 봤다. 에리카의 작고 슬픈 몸뚱이를 왠지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