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坂本 龍一)
살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는 날이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坂本 龍一)를 재발견했던 그 여름날 또한 내겐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류이치 사카모토, 유키 쿠라모토, 시크릿 가든, 이루마 등 뉴에이지 음악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유키 쿠라모토 악보집을 복사해서 돌려보고 연습했다. 쉬는 시간 음악실 피아노에서 차례로 연주했던 그 무렵의 음악들은 지금도 내게 아련한 감각을 일깨운다.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은 왠지 우울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쓸쓸하고 애잔해 캐롤송이라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음악을 좋아했다. 한여름의 농밀한 공기가 온통 거리를 뒤덮고 있던 오후, 친구들과 나는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 자그마한 갤러리에 도착했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업한 음악을 중심으로 한 전시가 한창이었다. 그와 나는 구면이었지만(엄연히 내 추억 속에서만) 그의 음악을 즐겨 듣던 시절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새롭게 만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류이치 사카모토를 안 적이 없다는 듯이 나는 그의 작업들을 새로운 마음으로 감상했다. 물, 빛, 소리로 이루어진 전시 공간은 몽환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만들어 놓은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음악만으로 그를 알았던 때와는 확실히 다른 경험이었다. 루프탑에 올라가 저 멀리 불어오는 바람에 청명하게 흔들리는 초록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그 순간,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은 절정에 달했다. 우리는 차가운 맥주를 한 손에 든 채 노랑, 분홍,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여름밤과 그렇게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재발견.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이었다.
집에 돌아와 그의 음악을 모조리 플레이리스트에 담았다. 여전히 류이치 사카모토는 어둡고 우울했다. 우리 삶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슬픔을 그는 여과 없이 음악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슬픔은 나를 절망으로 내몰지 않았다. 오히려 류이치 사카모토가 전하는 비극적 선율은 그 반대편에 있는 밝음을 떠올리게 한다. 슬픔이 있기에 희망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는 사실을 한 곡, 한 곡이 흐를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피아노곡 사이에 귀를 사로잡는 노래가 있었다. 류이치 사카모토 피아노 곡에 여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곡. 차분한 곡조에 마음이 저릿해왔다. 가사의 뜻도 모른 채 몇 번이고 들었다. 제목은 <철도원>. 예전에 봤던 일본 영화 철도원의 주제곡인 걸까? 2010년에 발매한 앨범 '우타우(歌う)/노래하다'에 실려있는 곡이었다.
철도원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만나러 가라.
저 산을 넘어서
지금 바로 만나러 가라.
고민이 있다면 여행을 떠나라.
마음을 단련시키며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라.
이제 곧 호각소리가 나면
하얀 역을, 기차는
너를 태우고 달릴 거야.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떠나라.
눈물을 참고
모든 이를 위해 떠나라.
(...)
소중한 사람을 따라 가자.
목숨을 맡기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
너무도 외로워지는 가사다. 동시에 이 가사는 더 외로워져도 괜찮다고 나를 위로한다. 노래 가사를 일기장에 끄적여 본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나는 그냥 이 노래 가사를 다이어리 한 페이지 가득 써 내려갔던 것 같다. 이 노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떠나라고, 사랑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맡기고 모든 것을 버린 채 떠나라고 말한다. 고민이 있다면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라고 재촉한다. 마음을 단련시키면서. 이 노래의 제목이 왜 <철도원>인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홀로 노후한 기차역을 지키는 역장 오토(다카쿠라 켄)는 새하얀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그곳에서 딸을 잃고, 아내를 잃는다. 죽은 딸은 외로운 아빠를 찾아와 잠시 곁에 머물지만 이내 떠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마저 눈 속에서 고독한 생을 마감한다. 시골 마을 종착역만이 유령처럼 남는다. 하지만 그곳마저 이내 사라져 버리겠지.
인생은 이별의 연속이며 홀로 남음의 연속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예상했던 슬픔을 맛보기도 하고, 예상치 못했던 기쁨을 받기도 한다. 고독을 입 밖에 내는 것조차 낯설어했던 남자, 오토에게도 짧지만 결코 잊지 못할 날들이 선물처럼 불쑥 찾아왔듯이. 그리고 결국엔 사랑했던 모든 것을 떠나, 혼자만의 여행을 떠날 때가 오는 것이다. 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플레이 리스트를 듣는 내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을 다시 읽었다. 청춘은 반드시 빛이 바래고 사랑은 끝이 나며 우리는 혼자 남는다. 하지만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건너 반드시 다시 사랑을 하고 꿈을 꾼다. 또다시 상실해갈지라도. 또다시 혼자 남게 된다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