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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Feb 12. 2019

"이거 진짜 비싼 거야"

구스타브 카유보트 <프티 쥬느빌리에의 리처드 갈로와 그의 개>


선물을 건네면서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생각지 못한 선물 꾸러미에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나, 저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게 돼버려요. 선물을 하며 "이거 진짜 비싼 거야", 말하는 사람의 심정도 백 번 이해됩니다. 너에게 주려고 정말 좋은 물건을 골랐다는 뜻일 테니까요. 어쩌면 '참 좋은 건데 뭐라 설명할 말이 없을 때' 우리는 그냥 편하게 '비싼 거야'라고 뭉뚱그려 표현하는 걸지도 몰라요.



그런데 요즘 들어 가까운 지인이 계속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좋은 것들에 대해 말할 때 항상 '비싸다'라는 추임새가 붙어요. 계속 듣다 보니 귀에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걸 가격으로 설명하려는 태도가 너무 속물적으로 보였달까요. 그래서 참다 참다 한 마디 했습니다. "넌 꼭 비싸야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제게 되묻습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었어?"



기습 공격을 받고 할 말을 잃었어요. 가만히 저를 돌아봤습니다.

엄마에게 좋은 화장품을 선물했는데 행여나 엄마가 그 가치를 몰라볼까 봐, 굳이 덧붙입니다. "엄마, 이거 진짜 비싼 거야." 친구들에게 맛있는 파스타를 먹었다고 자랑하고 싶은데 도무지 '맛있다'라는 말로는 다 설명이 안 될 때, 굳이 강조합니다. "거기 레스토랑 음식이 다 비싸더라." 제가 말할 때는 까맣게 몰랐던 거죠. 언제부터 좋은 것과 비싼 것을 동의어로 쓰게 된 걸까요?






사실 비싼 것 중엔 좋은 것이 많습니다. 동의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말이에요. 흔히 '비싼 값'을 한다고들 하잖아요. 하지만 좋은 것이 모두 비싸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 정말 좋은 것들은 값을 매길 수 없어요. 뻔한 이야기 같지만, 어쩌면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을지 몰라요. 진짜 가치는 돈에 있지 않다는 걸요. 더없이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아무리 비싼 값을 치러도 살 수 없습니다. 누구도 다시는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일상 속 행복한 추억들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하얀 모래알처럼 덧없이 우리 곁을 떠나가버리니까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구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는 흘러가는 일상 속에 찬란한 보석들이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이에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하루하루를 선명한 색채로 잡아낸 그의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줍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프티 쥬느빌리에의 리처드 갈로와 그의 개(Richard Gallo and his Dog at Petit Gennevilliers), 1884



카유보트 그림 중 제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세련된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가 강변을 걷고 있어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탓인지 좁은 길이 나있네요. 몇 발자국 앞에 털이 복슬복슬한 개 한 마리가 발랄하게 걸어갑니다. 주인의 옷과 개의 털 빛깔이 똑같아 슬몃 웃음이 나요. 청명한 하늘이 거울처럼 비치는 맑은 강물이 일렁이네요. 하늘색 지붕의 하얀 건물들이 강 건너 저 멀리 보입니다. 물가를 따라 피어오르는 풋풋한 풀내음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듯해요.



그림 속 주인공인 리처드 갈로 씨와 그의 귀여운 강아지에게 강변 산책은 매일 치러지는 의례 같은 것이었겠죠. 너무 익숙해져 더 이상 일기장에도 쓰지 않을 그런 일상적인 습관 말이에요. 하지만 카유보트 덕분에 어느 쾌청한 날의 이 장면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주인과 강아지 중 누가 먼저 저 그림 속에서 사라지게 될까요? 훗날, 홀로 강변을 산책할 이는 주인임에 틀림없을 거예요. 조그만 털 뭉치로 우리에게 왔던 저 생명체들은 눈 깜짝할 새 나이를 먹고 우리 곁을 떠나고 마니까요. 2년 전 제 곁을 떠난 사랑스러운 녀석이 떠오르네요. 12년을 함께했지만 아직도 다 주지 못한 사랑 때문에 가슴이 저려오는 제게, 카유보트의 이 그림은 묘한 위로가 됩니다.






무엇이든 지나고 나면 아쉬운 법입니다.

함께 했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하지만 일상 위에 펼쳐졌던 빛나는 순간들은 결코 되감기 할 수 없어요. 고작해야 사진과 동영상으로 그때의 조각들을 더듬거릴 뿐입니다. 재밌는 건, 카유보트가 포착한 일상의 장면들이 우리가 사진이나 동영상으로도 잘 남기지 않을 더 미세한 찰나의 순간이라는 점입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예르의 비(The Yerres, Rain), 1875



드디어 나왔네요. 

가 가장 좋아하는 카유보트의 그림입니다. 저는 물을 좋아하고, 푸른 나무와 비를 좋아하는데요. <예르의 비>는 그 모든 것이 통째로 담겨 있는 작품이에요. 저 멀리서부터 하늘이 차츰 흐려지고 잔잔하던 수면 위로 굵은 빗방울이 하나씩 똑똑, 떨어지고 있어요. 짙푸른 나뭇잎도 점차 젖어들겠네요. 조금 뒤면 후두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비가 세차게 쏟아져내리겠죠. 우산 위를 두드리는 빗소리는 점차 커질 겁니다. 비를 머금은 쌉싸름한 풀냄새도 공기를 맴돌 테고요. 이 그림은 수많은 여름날, 수많은 소나기를 만났던 저의 기억 중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불시에 끄집어냅니다.


 




프랑스 파리의 풍족한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카유보트는 22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법관이 되기를 포기했어요. 그 대신 선택한 직업이 바로 화가였죠. 레옹 보나(Léon Bonnat)의 스튜디오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프랑스 유일의 공적인 미술교육기관)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듬해 카유보트는 아버지를 여의고 말아요. 불과 26세의 일입니다. 슬픈 일이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그는 생계를 위한 돈을 벌 필요 없이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카유보트는 아름다운 그림들을 많이 남긴 화가입니다. 하지만 그에겐, 화가로서의 커리어보다도 인상주의 화가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인물이라는 평가가 더욱 선명하게 따라다닙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본 적 없었던 카유보트였지만 가난한 화가들의 상황을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받아들였어요. 돈이 없어 제대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사들여 그들을 경제적으로 도운 것도 그런 세심한 심성에서 나온 거겠죠. 



아마 그의 그런 성격이 그림에도 나타난 것 아닐까요. 

카유보트의 시선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순간에 아주 오랫동안 머무릅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오르막길(Chemin montant), 1881 




나는 유명한 사람을 찍은 사진보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유리창이 더 흥미롭다.



제가 좋아하는 사진작가 사울 레이터(Saul Leiter)가 이렇게 말한 적 있어요. 그는 일상성의 미학을 누구보다 깊게 깨달은 사람이었죠. 카유보트 역시 그런 사람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카유보트였다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몰라요.



나는 위대한 역사적 순간이나 값비싼 것들을 그린 그림보다 
빗방울 떨어지는 강물이 더 흥미롭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예르의 공원(the park at yerres), 1877



1년, 2년이 지나고 나면 생일날 무슨 선물을 받았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향수였던 것 같기도 하고, 목걸이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분명, 뭘 받았는지 기억은 나는데 지금은 온 데 간데 없어진 선물들도 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날의 분위기는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엄마가 테이블 너머의 내게 입모양으로 '생. 일. 축. 하. 해', 속삭이던 순간, 새빨간 딸기 케이크를 탐내며 쉴 새 없이 꼬리를 흔들어대던 우리 집 강아지의 통통한 엉덩이, 생각지 못했던 서프라이즈 선물을 건네던 친구들의 멋쩍은 웃음소리. 


정말 소중한 건, 바로 그런 순간들에 있었어요. 


굳이 값을 매겨야 한다면 일상 속에서 간과된 그런 아름다움들이야말로 

"이거 진짜 비싼 거야", 똑똑히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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