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라 Feb 05. 2019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에드워드 호퍼 <파란 밤>



이런 말을 듣는 게 정말 싫었어요. 누군가한테 '예민하다'라는 평을 들으면 왠지 제가 너무 앞뒤 꽉 막힌 재미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어요. 작은 일에 발끈하고, 소심하게 구는 못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달까요. 그 말이 가슴 어딘가에 탁, 부딪혀 '내가 그렇게 예민한 사람인가' 곱씹고 있는 것도 너무 싫었죠.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너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무슨 농담도 못하냐' 이런 핀잔을 받을 땐 빵점짜리 쪽지 시험지를 받아 든 초등학생처럼 의기소침해지곤 했어요.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개의치 않고 받아넘기는 사람이 쿨하고 멋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나름대로 연습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누가 내게 거슬리는 말을 해도 예민하게 짚고 넘어가지 말자. 그 사람도 그냥 한 말일 거야. 자존심만 센 사람처럼 보이면 안 되니까 참자. 처음엔 하고 싶은 말들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이것도 조금 익숙해지니 참을만하더라고요. 정말 뼛속까지 쿨한 사람도 아니면서 그런 척하는 데 익숙해진 거죠. 그런데 이렇게 행동하니 의외로 좋은 점도 있더군요. 제가 정말 쓸데없이 예민하게 반응했던 게 뭔지 가려낼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럴 필요까진 없었네, 싶은 일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재미있는 건요. 아, 정말 예민하게 지적했어야 하는 거구나, 싶은 일들 또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언제 어디든, 타인의 약점을 파고들어 교묘하게 괴롭히는 이들이 있죠. 이들에게 발끈하는 순간 돌아오는 가장 흔한 말. 야, 뭘 예민하게 구니? 너한텐 농담도 못하겠다. 아무리 농담이었다 해도(사실 정말 농담인진 알 수 없지만요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다면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문득, 마음 넓고 뒤끝 없는 사람처럼 보이려다 정작 해야 할 말조차 하지 못하는 흐리멍덩한 사람이 돼버릴까 겁이 났어요. 이래도 오케이, 저래도 오케이. 만사 물 흐르듯 아무렴 어때, 허허 웃고 마는 사람이 정말 멋진 걸까요? 저는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 



왜 '예민하다'라는 말에 그렇게 예민했던 걸까요? '예민하다'라는 단어 위에 막연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정말 오랜만에 국어사전을 뒤적여 봤습니다. 



예민(銳敏)하다 ;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



결코 나쁜 뜻이 아니었어요. 그러고 보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중한 무언가를 찾아내는 이들은 대부분 감각이 매우 예민합니다. 시인, 소설가, 예술가 등이 가장 대표적이죠. 투박한 돌멩이가 가득 깔린 길 위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벚꽃잎을 찾아낼 수 있는 섬세한 눈과 심장을 가진 사람들. 어쩌면 세상은 그런 사람들 덕분에 조금씩 더 아름다워질 수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예민한 감각으로 회색빛 도시에서 달콤 쌉싸름한 색채를 찾아낸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도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였죠. 



에드워드 호퍼



뉴욕에서 태어난 호퍼는 사실주의 화풍으로 당대 미국 사회의 단면을 포착한 화가였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어느 하루'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숨 쉬고 있어요.  



<푸른 밤>은 호퍼가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그린 작품입니다. 



에드워드 호퍼, <푸른 밤Soir bleu>, 1914



잘 알려진 호퍼의 다른 그림들에 비해 조금은 생소한 작품이죠. 호퍼가 서른두 살에 그린 그림입니다.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이지만, 당시 호퍼는 무명작가였어요. 마흔 하나까지 그림 한 점 팔지 못하며 고전했으니까요. 광고 회사에서 일하며 계속 그림을 그리다, 마흔셋이 되어 마침내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출세작을 그려내죠. 어쨌든 호퍼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며 마주치는 단조로운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세밀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가슴에 담아둡니다. 



호퍼는 기억에 의지해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파리에서 만났던 군상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작업한 거죠. 그가 기억하는 파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가장 왼쪽, 모자를 쓴 채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는 남자는 매춘 알선업자를 묘사한 것이라고 해요. 볼과 입술을 붉게 칠하고 가슴이 깊게 파인 초록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매춘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오른쪽 끝자리의 수염 난 남자는 부르주아를 상징합니다. 동석한 여자는 아랑곳 않은 채 얼굴까지 조금 달아올랐네요. 가운데 테이블엔 퇴역 군인과 베레모를 쓴 예술가가 앉아있어요. 우울한 얼굴의 피에로는 어딘지 지쳐 보입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누구도 서로 닮지 않았습니다. 각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불편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물론 실제 파리에서 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갈등 없이 섞여 들어 살았다는 말은 아니에요. 다만 호퍼가 나타내고 싶었던 장면이 그런 것이었던 거죠. 



그림 속 인물들은 대화도 나누지 않고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매춘부를 쳐다보는 부르주아 남성의 눈조차 정확히 그녀를 향하지 않아요. 조금 아래로 내리깐 눈은 생각에 잠긴 듯합니다. 호퍼 그림의 독특함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에드워드 호퍼, <주유소Gas>, 1940



에드워드 호퍼, <뉴욕의 어느 방Room in New York>, 1940



해 질 녘 주유소에서 홀로 일하는 남자도, 한 공간에 함께 있는 남녀도 자기만의 시간 속에 서 있습니다. 특별한 의미 없는 일상의 한 장면도 호퍼에게는 허리를 숙이고 귀를 기울이면 잔잔한 음률이 흘러나오는 오르골처럼 보였나 봐요. 1959년, 어느 인터뷰에서 호퍼는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내가 그림을 통해 추구해온 목표는 
어떤 대상을 향한 나의 가장 내밀한 감각을 
될 수 있는 한 정확히 묘사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 뉴욕은 상상 이상으로 활기차고 분주한 도시였을 거예요. 그런 곳에서 호퍼의 마음이 향한 하나의 컷은 어둔 배경 속에 골똘히 서 있는 어느 여자이고 남자였죠. 그는 그들을 섬세하게 화폭에 담았습니다. 만일 호퍼가 예민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면 뉴욕 어느 거리의 쓸쓸한 밤 풍경도, 조용한 호텔방의 말 없는 커플의 모습도, 영화관 벽에 기대어 입술을 깨물고 있는 여인의 모습도 우리는 볼 수 없었겠지요. 누군가 붙잡지 않았다면 금세 날아가버렸을 그 일상적인 장면들은 세련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호퍼만의 붓질로 되살아나 우리 앞에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요.  



에드워드 호퍼, <뉴욕 영화관New York Movie>, 1939





호퍼의 그림을 하나하나 넘겨보며 가만히 생각합니다. 

예민한 성격 때문에 쓸데없는 속앓이도 많이 하지만, 그 성격 덕분에 조금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사는 것이라고요.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해 봅니다. 


그리고 좀 예민하면 어떤가요. 

둔감해지기 위해 억지로 나를 몰아세우고 싶지 않은걸요.  









이전 01화 "넌 살만 빼면 예쁠 것 같은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