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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Jan 29. 2019

"넌 살만 빼면 예쁠 것 같은데"

니키 드 생팔 <거꾸로 서 있는 나나>


이 말을 듣는 게 제일 짜증 난다고 하더군요.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활기 넘치는 제 친구가 말이에요. 부끄럽지만, 저도 몇 번인가 그런 말을 친구에게 한 적이 있었어요. 저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네요. 괜히 뜨끔합니다. 제 딴에는 칭찬이라고 했던 말을 지금 돌이켜보니 낯 뜨겁기 짝이 없습니다. 친구가 조금 당황한 제 표정을 보더니 톡 쏘아붙이네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게 나를 평가하고 지적할 자격이 있냔 말이야. (너도 마찬가지고.)

 


타인에게 '~만 하면', 이라는 조건을 다는 것부터가 주제넘은 일이겠죠. 그런데 가만히 사람들을 지켜보면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많이들 합니다. 물론 저도 포함입니다. 대체 왜 그런 걸까요? 왜 타인을 나의 시선으로 평가하고 당당히 말로 내뱉는 걸까요? 다른 이들의 생각까지 알 수 없으니 제 자신에게 먼저 묻습니다. 글쎄요. 이게 정답일 순 없겠지만 제 생각엔 말이죠, 어떤 확고한 '기준'이 있다고 믿기 때문 아닐까요? 예쁘다, 말할 수 있는 기준은 예상외로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큰 눈, 작은 얼굴, 뽀얀 피부, 날씬한 몸매. 이 정반대의 조건을 가진 사람에게 우리는 흔히 예쁘다, 말하지 않죠.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어느 시대건 아름다움의 기준은 확고히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지금까지도 그리 크게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준이 있다는 것만으로 비판받을 수는 없어요. 어디에나 기준은 있고, 누군가는 그 기준을 따릅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전복시키거나 부숴버리죠. 세상 모든 기준을 없애버리자고 하는 건 터무니없어요. 하지만 그 기준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예요. 누구도 직접적으로 '이 기준을 따라라', 라는 명령을 하지 않지만 그 기준을 따를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암묵적으로 조성하는 것 역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죠. 



친구는 바로 그런 점에서, 화가 났던 거였어요. 스스로에 대한 어떠한 불만도 없는데 왜 자꾸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고쳐야 할 점을 가르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죠. 그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속이 답답해져 옵니다. 내가 전혀 따르고 싶지 않은 기준을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강요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재밌는 건, 그런 무언의 강요가 계속되면 나도 모르게 '아, 저 사람들의 말대로 해야 하는 걸까', 생각하게 된다는 거야. 웃기지 않니. 




문득 깨닫습니다. 작년에 잘 들어갔던 옷이 꽉 끼면 왠지 우울해집니다. 피부에 뾰루지라도 나면 밖에 나갈 마음이 싹 사라지죠. 뽀얀 피부와 날씬한 몸매를 갖기 위해 나를 몰아세워왔어요. 누구도 제게 직접적으로 강요한 적 없지만, 저는 스스로를 구속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렇다고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벗어버릴 용기가 제겐 없어요. 그래서일까요.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1930~ 2002)의 <나나Nana>를 처음 보았을 때 쿵쿵, 가슴이 뛰고 웃음이 났어요.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강렬한 에너지로 칭칭 둘러싸인 소녀, 나나. 


 

니키 드 생팔, 거꾸로 서 있는 나나(Upside-down Nana), 1967



저는 물구나무도 서지 못해요. 아니, 만약 설 수 있다 해도 나나처럼 보란 듯이 물구나무를 서지는 못할 거예요. 행여 누가 보면 욕이나 하지 않을까. 이상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하진 않을까, 싶어서요. 하고 싶은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즐겁게 놀고 있는 나나의 모습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어요. 색색의 화려한 수영복을 당당하게 차려입은 통통한 소녀. 프랑스어로 나나(Nana)는 소녀를 일컫습니다. 생팔은 자유롭다 못해 하늘을 날고 있는 것만 같은 '나나'를 신나게 만들어냈어요. 



니키 드 생팔, 검은 나나(Black Nana), 1999.



이런 작품을 만든 생팔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습니다. 재밌게도 그녀는 나나와 전혀 닮지 않았어요. 극과 극에 서 있다고 해도 믿을만합니다. 프랑스의 부유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생팔은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자였어요. 커다랗고 푸른 눈, 하얀 피부, 여리여리한 몸매까지. 스물두 살엔 패션 잡지 '보그(Vogue)'지의 표지 모델을 하기도 했죠. 타고난 미모를 가진 금수저라니. 정말 남부러울 것 없었겠네요.   



1952년 11월호 파리 보그지 표지 모델이었던 니키 드 생팔.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은,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까진 결코 알 수 없는 법이에요. 생팔은 모든 걸 가진 여자였지만 부모님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생팔의 아버지는 딸을 강간하기도 했습니다. 보수적인 가톨릭 집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겠죠. 그런 부모 아래서 어린 소녀는 늘 두려움에 떨었겠죠. 

 


“아버지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아버지와 나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았다. 
사랑이었던 모든 것이 증오로 변했다. 

나는 살해되었다고 느꼈다.”



불과 열한 살의 일이었어요. 이 사건 이후 생팔은 분노와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남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을 그녀의 삶은 사실 군데군데 곪고 찢어져 너덜거리는 상처투성이에 불과했던 거예요. 그럼에도 생팔은 세상이 보기에 반짝이는 겉모습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내면이 불행해질수록 더욱 외면에 집착하게 된 거죠. 결혼해 아이를 낳은 뒤엔 불어난 몸을 원상 복귀하지 못할까 두려움에 떨다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에 가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니스에 있었던 그 병원에서 생팔은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쉽게 이해하긴 어려워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무언가에 몰두한다는 것. 무언가에라도 몰두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처절한 감정. 그러나 저는 분명 알고 있어요. 고통 속에서 자신을 버리기보다 살리기 위해 이 악물고 운명에 맞서는 이들은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요. 그 과정을 견뎌낸 이들은 이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새롭게 태어나요. 생팔 역시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그림을 통해 살아갈 의지를 얻었어요. 새로운 사람이 되었어요. 



그렇게 다시 살게 된 그녀에게 거대한 엉덩이와 가슴을 드러낸 채 천진난만하게 춤추는 나나는 해방구이자 숨구멍이었습니다.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에도 아랑곳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뛰노는 나나. 그래서 생팔은 그렇게도 나나를 만들어냈던 걸까요.   



1968년 4월, <나나>와 함께 서 있는 니키 드 생팔.



나나 무리에 둘러싸인 생팔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비록 생팔 자신은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녀에겐 나나가 있었죠.  그녀는 나나라는 아바타를 만들어 세상을 비웃기로 결심했어요. 당당하게 선 생팔 주위의 나나들이 마치 생팔을 지켜주는 무기처럼 보이네요.  



누구도, 나나에게 "넌 살만 빼면 예쁠 것 같아",라고 말할 수 없을 테죠. 나나는 그런 말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을 테니까요. 지적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적에 움츠러드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것 같아요. 그걸 알아챈 순간부터 더욱 집요하게 그 사람을 평가하고 지적하거든요. 나한테 저런 말을 하는 사람에겐 길게 답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이 말 하나면 될 것 같네요. "내가 알아서 할게." 



친구가 더 과격한 말을 했지만, 차마 여기에 그대로 쓰진 못하겠네요. 조금 순화해서 적어봅니다. 



"다들, 자기 인생이나 신경 쓰면서 삽시다. 

내가 살을 빼든 안 빼든, 예쁘든 안 예쁘든 당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답니다."



니키 드 생팔, 백색의 춤추는 나나Nana blanche dansante,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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