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정성스럽게 키운다고 해놓고"
엄마가 나를 어떻게 키웠을까를 생각해본다. 장사를 했던 나의 엄마, 아빠는 늘 바빴다. 주말에 아이와 놀아주기보다는 가게 문을 열어서 하나라도 더 파는게 중요한 분들이었고, 방학 때는 세 남매 중 둘 이상은 외갓집에 가 있어야 했다. 부모님과 특별히 재밌게 놀았던 기억은 없다. 다만 우리집은 다툼이 없고, 화목했으며, 특별할 일은 없었던 가족이었다. 비록 사춘기는 호되게 겪었지만 어찌됐든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자라왔다.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 부모님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외동이거나 형제가 하나정도 밖에 없었다. 난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 낀 불편한 둘째였기에 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언니가 쓰던 걸 받거나, 동생이 질려하던 물건들이 내 차지였으니. 다행히 대가족 틈에 살았기 때문에 크게 엇나가지 않고 단단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곤 있지만, 자격지심은 내 마음 구석 언저리에 늘 껌딱지처럼 붙어있었다.
그래서 스무살전까진 안좋아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나서는 달라졌다. 날카로운 성격이 무뎌지고, 바쁘게 살아온 부모님의 생이 마무리를 향해 차츰 속도를 늦춰가고 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우리 사이에는 대화라는게 생겼고, 여느 가족보다 늦었지만 더 행복한 관계를 갖고 있다.
아빠는 어릴 적 기억보다 더 다정한 사람이었고, 엄마는 서른 일곱이 다돼가는 딸의 숟가락에게 반찬을 올려준다. 손주를 사랑하지만, 손주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딸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신경쓰이고 손주를 아끼지만 딸 머리에 생긴 흰머리를 걱정하는 부모님이다.
내가 아이를 하나만 낳기로 한 이유 중 하나가 우리 가족이었다. 삼남매 틈에서 사랑을 갈구하며 살아온 어린시절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하나 낳아 정성스레 키우자가 내 모토였다. 아이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엄마가 너를 정성스럽게, 아주 아끼면서 소중하게 키워줄거야."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사랑받고 있음을 함뿍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밤, 서운한 일이 많았던 아이가 내게 되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정성스럽게 키워준다고 하지 않았어?"
아이를 키우면서 친정엄마와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엄마는 좀 나를 막 키운 것 같아"
"어휴 내가 얼마나 너를 귀하게 키웠는데~"
진실은 모른다. 엄마가 대충 키운 것 같은데, 엄마는 정성스레 키웠단다. 이래서 타산지석이 되는가보다. 나는 정성스럽게 키운 것 같은데, 우리 아이도 자꾸 묻는다. 이게 최선이냐고. 엄마는 늘 억울한가보다. 나도 아마 엄마처럼 억울한 엄마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엄마가 나를 귀하게 키웠다는 데에 반은 공감하고, 반은 부정한다. 엄마의 정성을, 어린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 커버린 나를 통해 정성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귀하게, 소중하게 키우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렇게 마음이 단단하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클 수 있었을까.
아이를 키우며, 엄마의 아이였던 나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