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지 않아도 화를 내는 노련함.
고등학교 시절에 어느 주말이었다. 점심 즈음에 하교를 했고 어김없이 엄마는 현관문 앞으로 마중을 나와 주셨다. 그런데 엄마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어이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그리곤 내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를 가리켰다.
담배였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항상 소화전에 숨겼었는데, 그 날은 곧바로 밖으로 나올 예정이어서 방심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소름 끼치게 창피하고 나조차도 어이가 없다. 교복을 입고 가슴팍에 담배를 꽂고 다녔다니. 나는 고작 나온다는 말이 '내 거 아니다, 친구가 잠깐 맡겼는데 내가 그냥 가져왔나 보다.'였다. 당연히 엄마가 믿지 않을 거란 걸 알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나에 대한 엄마의 실망감을 어떻게라도 줄여보고 싶었기 때문에. 또 앞으로 아빠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을 알았기에. 하지만 속상한 얼굴로 나를 혼낼 줄 알았던 엄마는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서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차라리 때려주지. 학생이 어디서 담배에 손을 대냐며 혼쭐을 내주지. 그 찰나의 순간에 내가 얼마나 한심하고 철 없이 행동했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 뒤통수를 한대 후려 맞은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저히 당장은 엄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밖에 친구가 기다린다는 거짓말을 하고 도망 나왔다. 그리고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버렸다. 나 자신이 너무 싫음과 동시에 엄마에게 한없이 미안해서.
엄마는 아빠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더 이상 나에게 담배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그때 참 많은걸 느꼈었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한마디로도 상대방에게 수많은 생각을 갖도록 할 수가 있다는 것. 화를 내는 것보다 더 치명적으로. 비록 초심을 잃고 다시 흡연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가끔 그때가 생각난다. 어른이 왜 어른인지 한 번씩 되새기며, 엄마 같은 어른이 되어야지 또 한 번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