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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챠 Feb 03. 2024

도망치지 않았던 그녀

딸, 오늘은 이사벨 이야기를 들려줄까 해. 이사벨은 명랑하고 쾌활한 아가씨였어. 그런데 이 아가씨가 큰 돈을 유산으로 상속받게 돼. 젊고 재기발랄할 뿐만 아니라 매력이 넘쳤던 이 아가씨에게 많은 유산까지 생겼으니 주변 여러 남자들이 그녀에게 대쉬하지. 


여러 남성들이 이사벨에게 청혼을 했어. 하지만 이사벨은 그 청혼들을 거절해. 그녀에겐 세상을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 그런 여정 중에 이사벨은 이탈리아에 가게 됐어. 근사한 예술가들의 나라! 그 곳에서 오스먼드라는 멋진 남자도 만나. 그 남자는 팬지라는 딸을 홀로 기르는, 가난한 예술품 수집가였어. 


이사벨은 착하고 예쁜 팬지와 정이 들고, 딸을 혼자 키우며 가난하게 살지만 고상한 취향을 지닌 오스먼드에게 호감을 느껴. 마침 마담 멀(Merle)이라는 친구가 적극적으로 주선한 덕에 이사벨은 오스먼드와 결혼을 하지. 이사벨의 이모는 마담 멀이 좋은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오스먼드 역시 좋은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결혼을 말려. 하지만 이사벨은 뭐든지 직접 선택하고 싶었고, 그래서 결혼을 하지.


여기서부터 이사벨의 시련이 시작돼. 다른 훌륭한 남편감들은 거절하고 결혼한 남자, 오스먼드는 막상 결혼하고 보니 이사벨이 생각했던 근사한 사람이 아니었거든. 


무엇보다 오스먼드는 사실 이사벨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어. 그가 사랑했던 건 이사벨의 돈에 불과했어. 단지 이사벨의 유산을 탐낸,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사람이었던 거야. 


결혼 후 오스먼드는 이사벨에게 사사건건 간섭하고, 딸에게도 마찬가지였어. 자연히 이사벨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게 돼.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곧이어 충격적인 사실까지 밝혀지지. 오스먼드의 딸, 팬지는 사실 오스먼드와 마담 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어! 멀은 팬지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숨기고 의도적으로 이사벨에게 접근해서 오스먼드와 결혼하도록 부추겼던 거야. 자신의 딸에게 돈이 많은 새어머니가 생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야.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사벨은 어떻게 했을까? 이사벨의 친구인 헨리에타는 오스먼드와 헤어지라고,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끝내라고 종용하지. 다른 한편으론 예전에 이사벨에게 청혼했던 남자가 다시 나타나. 그리고 그녀에게 구애. 형편없는 남편과의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과 함께 가자고 말이야. 


시작부터 사기 당한거나 다름 아니었던 결혼, 그리고 전혀 행복하지 않았던 결혼 생활. 이사벨은 곧장 오스먼드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어. 자신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하는 구혼자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있었지. 또 자신을 속인 마담 멀을 실컷 원망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이사벨은 그렇게 하지 않아. 


이사벨은 아마 [마담 멀이]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에 이사벨은 자신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데 일순 공포를 느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부당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중얼거렸다. “내 [짐은] 내가 직접 져야지 남에게 떠넘겨서는 안 돼!”

번역은 민음사, <여인의 초상> 2권 판본 참조. []는 내용 이해를 위해 수정한 것.


딸아, 이게 바로 이사벨의 멋진 점 아닐까? 그녀가 속았다는 건 세상 모든 사람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거야. 이사벨도 그 사실을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지. 하지만 “그러니까 이 모든 게 그 두 사람 잘못이고 나는 속아버린 피해자야” 라고만 생각하지 않는것. 그리고 어떤 이유로건 이제 자신의 수양딸이 된, 자신의 슬하에 있는 팬지를 외면하지 않는 것 말이야. 이사벨은 단순히 오스먼드에게서 도망치지 않아. 


이사벨은 모든 진실을 알고 남편이 있는 로마로 돌아가. 이 이야기는 이사벨이 돌아가는 장면에서 끝나. 하지만 이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사벨이 이전과 똑같은, 단조로이 불행한 생활을 단순히 되풀이할까? 엄마는 그럴 것 같지 않아. 그녀가 남편에게 돌아가는 건 예전의 불행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모가 말리고 친구가 말렸어도 강행했던 결혼, 자신의 그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이고, 또 수양딸 팬지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는 건 좀 더 쉬운 선택일 수 있어. 반대로 스스로 선택한 몫을 인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 마주한 상황에서 도망치는 건 오히려 쉽지만 견디고, 버텨내고, 책임지는 일은 더 힘든 법이야. 그렇기 때문에 이사벨에게서 배울 점이 있지 않을까?


삶이 항상 공명정대할까? 네게 일어나는 일이 늘 옳고 마땅할까? 모든 것을 완전히 네 자의에 따라,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날들이 무척 많을 거야. 돌아보면 억울한 일들도 많을 거야. 부당하고 억울한 일에 대해 무조건 감내하고 참고 견디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엄마는 네게 그런 길을 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란다. 


하지만 언제나 스스로 책임져야 할 몫을 남에게 떠넘기지는 말렴. 다른 사람 탓을 하면서 스스로의 실패를 정당화하지도 않기를 바라. 당당히 마주할 것은 마주하고, 책임질 것을 책임지며 살아갈 때 인생은 더 풍요로워 질거고, 너는 더 멋진 사람이 될 거야. 남편에게 돌아가는 이사벨의 앞날이 우울한 회색빛으로 전망되지 않듯이, 그곳에 반짝이는 빛이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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