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임신을 했거나 준비하고 있는 친구들이 제법 생겼다. 이젠 나도 어쩌다 보니 그들에게 육아 선배라, 아기 키우는 건 어떠냐는 질문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알맞은 말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창살 없는 감옥이지.”
아기를 갓 낳았을 때, 나의 오랜 육아 선배는 이렇게 말했었다.
“인생에서 제일 눈부신 시간이죠.”
이런 말도 들었다. 감옥과 눈부신 시간. 그 중 무엇이 정답에 가까울까. 세상사에 정답은 없다지만, 나는 정답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육아경력 1년이 가까워지는 시점에서 깨달아가는 건 둘 모두 정답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없이는 먹을 수도, 놀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는 존재와 함께한다는 것. 육아는 이제껏 내가 해온 어떤 일과도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막연히 새롭다고만 생각하다 알게 되었다. 나는 평생 돌봄노동에 종사해본 적이 없었다는 걸. 육아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나를 쓰는 일이었다. 그건 때때로 스스로를 옥죄는 일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 안, 아직 사람의 말을 모르는 아기와 단둘이 거실에 있다 보면 실감났다.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말, 그건 정말 딱 맞는 비유였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과자를 한 봉지 사서 까먹다 보면 느끼게 된다. 먹고 있는데도 아까운 느낌. 지금 내 입 안에 들어 있는 과자가 시시각각으로 아쉽다.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자마자 과자는 스르르 녹아버린다. 아기와 함께 있는 시간이 그렇다. 순간순간이 값지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는 이해할 수 있다. 이 작은 사람은 웃음이란 걸 어떻게 배웠을까. 누구에게 배웠는지 알면 나도 배우고 오고 싶을 정도로, 아기의 웃음은 멋지다. 하나도 티가 없는 웃음이다. 육아를 하면 공짜로,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걸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웃음도 지금의 웃음은 아니기에, 웃고 있는 걸 보면 아쉽다. 발등이 통통한 발도, 늘 무언가 집기 바쁜 엄지와 검지도 내일은 지금과 다를 거라는 생각에 침이 꼴깍 넘어간다. 놓치지 말자, 놓치지 말자 다짐하지만 다짐하는 순간 시간은 흐르고, 모두 놓쳐버린다. 매 순간이 그렇게 눈부시다. 눈부신 시간이라는 비유도 그러니, 아무것도 더하고 뺄 것이 없이 딱 맞다.
더 큰 고통, 더 큰 행복.
요가를 하다가 문득 이런 말이 생각났다. 이거다. 육아를 설명할 수 있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적확한 문장. 이제 누군가 육아가 어떠냐고 물어온다면 뜸들이지 않아도 된다. 신나서 집으로 와서는 아기를 먹이면서 또다시 생각했다.
'그런데 육아뿐 아니라 매사가 마찬가지 아닌가?'
고통이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고통과 행복은 원래 비례하는 것 아닐까 생각하니, 아까 길어 올렸던 문장이 심심하게 느껴졌다. 모든 사람에게 잘 맞는 물건은 국민템으로 사랑받겠지만, 내가 두고두고 아낄 애장템은 아닐 확률이 높다. 문장도 비슷했다. 어느 것에나 잘 맞는 문장은 동시에 그 어떤 것에도 완전히 맞지는 않는 문장일 수 있다. 김이 빠졌다.
아기를 재우고 식탁을 정리하다가 다시 생각했다.
'아니야. 분명 달라!'
드디어 머릿속에 뜬 느낌표. 그렇다. 분명 다르다. 육아에서 고통과 행복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고통이 커질수록 행복이 커지는 것도, 작아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날은 고통만 크고, 어떤 날은 행복만 가득하다. 엄청나게 힘들었던 어떤 날, 동시에 엄청나게 행복한 일도 있었다. 육아에서 고통과 행복은 다른 집에 살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누구 하나 빠질 수 없는 손님이라는 것.
더 큰 고통과 더 큰 행복.
이렇게 말하면 더 정확하다. 하루의 진폭이 훨씬 더 커진다. 아기를 갖기 전, 나는 우울증을 앓았었다. 이름과는 다르게 내가 경험한 그 병의 증상은 우울이 아니었다. 병원에 가고 약을 먹는 내내 나를 괴롭힌 건 무감각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도, 되고 싶지도 않은 기분. 기분은 생명이 없는 사람처럼 종일 그대로였다. 바람을 쐬어도, 좋아하는 곳에 가도 좀처럼 오르지 않았고 늘 무거운 공기처럼 가라앉은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던 기분이 지금은 제멋대로 날아다닌다. 바람에 나부끼는 비닐 봉지처럼 오르락 내리락. 금방이라도 인격의 바닥을 보는 듯 곤두박질쳤다가도 곧 신선이라도 만날 것처럼 신나버린다. 웃음이 터지는 순간도 다르다. 우아한 웃음이란 없다. 매번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뜻밖의 웃음을 맞닥뜨린다. 준비되지 못한 채로 푸핫, 웃음을 터뜨려버린다. 방귀나 트림처럼 푹 하고 터진 웃음은 이내 깔깔깔 하는 소리로 바뀐다. 여고시절의 나처럼 웃겨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여러 번. 그렇게 앞뒤 재지 않고 웃는다.
여태껏 경험한 고통과 행복 중 무엇이 더 클까. 고통이 크다면 육아는 굳이 안 해도 되는 것, 행복이 크다면 육아는 그래도 해볼 만한 것이 될 것이다. 아기가 자는 모습이 보이는 홈캠을 켜놓고 식탁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이 문제는 동지의 도움을 빌려야 할 것 같다. 싱크대에서 한창 젖병 설거지 중인 남편에게 묻는다.
"육아하면서 고통이 커, 행복이 커?"
"글쎄, 모르겠는데. 근데 그걸 왜 생각해?"
"그래야 육아가 할 만한지 아닌지 결론을 내리지."
"그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노력해야 되는 거 아냐? 고통은 줄이고, 행복은 늘리면 되지."
"어떻게?"
"우리 지금 하고 있잖아. 힘들 때는 보육센터에 아기 잠깐 맡기고, 일주일에 세 번 아기 봐주실 시터 선생님 면접도 봤고."
역시. 뼛속까지 F인 내가 고통과 행복을 감각하려 애쓸 때, 아마도 태아 때부터 T였을 인간은 고통과 행복을 다룰 방법을 찾고 있다. 태생이 다른 인간에게 또 하나 배운다.
더 큰 고통, 더 큰 행복. 그것이 육아. 고통은 더 작게, 행복은 더 크게. 그것이 육아고수가 되어가는 길. 고수가 되려면 멀었지만, 어느 덧 2년차 육아 종사자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