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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Apr 04. 2024

아가, 내 꿈에는 네가 없어

오랜만에 바다에 왔다. 휴가철이었는지 사람이 많았고, 발부터 조금씩 바닷물에 적셨다. 마침내 바닷물이 쇄골까지 차오른 순간, 웬일인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더니 주위가 온통 하얀색으로 변했다. 왼쪽에는 문이 생겼다.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나의 연인이었다. 아무도 없는 하얀 바닷가에 연인과 나, 둘만 있었다. 심지어 굳게 문이 닫힌 바닷가. 연인은 나를 향해 물 속으로 들어왔다. 한 발, 또 한 발. 드디어 마주한 우리. 서로를 부둥켜 안고 부표 삼아 둥둥 물 위에 떠 있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에서 우리 둘만 둥둥.

 

“다섯 시 다 됐다. 이유식 먹이자.”

꿈이었다. 잠을 깨운 사람은 나의 연인. 나와 함께 바닷속을 유영하던 그는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지?’ 생각했다. 

여기는 2024년의 집 안. 우리는 결혼을 했고, 연인이 아니라 부부가 되었다. 우리는 꿈 속에서처럼 더 이상 둘이 아니고, 셋이다. 뒤늦게 기억해냈다. 


지난 밤, 아기를 재우고 새벽까지 일을 하다 잠들었다. 아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 여섯 시 반에 잠을 깼고, 우는 아기를 먹이고 달래다 아기 옆에 누워 잠이 들었다. 아기 울음소리에 깨서 아기와 놀아주다가 잠들고 다시 깼다 잠들기를 몇 차례. 엄마를 깨우다 지쳤는지 아기도 함께 잠에 빠졌다. 


오늘은 문화센터 개강 날. 열 시쯤 일어난 남편은 일어나자마자 이유식을 데우고 우리를 깨웠다. 다시 아기를 먹이고 아기 옷을 갈아입힌 후, 남편과 교대로 씻고 준비를 했다. 기저귀가방을 싸고, 아기를 카시트에 태우고 백화점으로 출발. 문화센터 수업 전까지는 4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 정도면 아주 여유로운 편. 


백화점 식당가로 가서 음식을 주문했다. 오후 두 시가 다 되어 떠보는 밥 한 술. 쌀알 하나하나가 씹히는 밥맛이 너무 좋아서, 남편에게 물었다. 

“혹시 자면서 꿈꿔?”

“가끔 꾸지.”

“꿈꿀 때 너는 아기가 있어, 없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어.”

“아기가 있는 꿈은 어떤 꿈이었어?”

“그냥 평소같이 아기 보는 꿈.”

자면서도 육아를 하다니. 과연 성실한 아빠다웠다.


“나는 꿈을 꿀 때마다 아기가 없어.”

“아기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럴 리가. 그런데 꿈에서 나는 항상 아기가 없는 상태야.”

여행을 가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등산을 하거나. 무엇을 하든 꿈 속의 나에겐 아기가 없었다. 꿈을 꾸고 나서 한참을 되짚어 생각해야 했다. 나는 결혼을 했고, 임신을 했었고, 지금 나에겐 아기가 있다는 것을. 


아기 울음소리에 잠에서 깰 때도 비슷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떠 아기방으로 가서 울고 있는 아기를 달래다가도 ‘이 아기가 내 아기구나’ 하고 꼭 안는 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가끔은 지금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헷갈렸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그를 닮은 아기의 엄마가 된 나를 꿈꾸는 중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아기를 안은 손 대신 입을 이리저리 실룩이며 감각을 깨웠다. 꿈이 아니라는 실감이 날 때까지. 


문화센터에 다녀와서 다시 아기를 먹인 뒤, 남편이 아기를 돌보는 사이 잠깐 잠이 들었다. 그때 꾼 꿈이 ‘닫힌 바다꿈’이었다. 완전히 꿈과 환상 같은 내용이었지만, 그를 붙잡고 떠 있는 감각이 온몸에 생생했다. 


지금의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 안는 일이 없다. 이전처럼 식사를 하며 다정한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 종일 번갈아가며 한 명은 아기를 돌보고, 한 명은 부족한 잠을 보충하거나 일을 한다. 아기가 자고 나면 끝내지 못한 일을 하거나, 각자의 방식으로 쉰다. 잠에 들 때는 늘 지지직 소리가 함께 한다. 볼륨을 최대로 높여 켜둔 아기방의 홈카메라 소리다. 아기가 깰세라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몇 마디 중얼거리지만, 그것도 잠시. 남편은 얼마 못 가 곯아떨어지고, 혼자 남은 나는 이것저것 생각을 한다. 


아기를 언제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지. 이 다음엔 어떤 일을 해야 하지. 지금 하는 일은 어떻게 끝맺지. 계속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 계속 하지. 써둔 글은 어떻게 묶지. 나에게 그럴 시간이 있을까. 생각 끝에는 아기가 없다. 갑자기 엄마가 되어버린 내가 있을 뿐. 


아기에게 미안하다. 너를 먹이면서 계속 내 생각만 해서. 너를 재우다가도 일 생각이 나면 너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정신없이 휴대폰에 뭐라고 뭐라고 적는 엄마라서. 네가 있어서 너무 행복한데, 또 너 하나로만은 행복하지 못해서. 생에 한 번뿐일 너의 192일을 충실하게 보내지 못해서. 그래도 아가야, 네가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우린 함께니까 내가 잠들 동안은, 그때 잠깐만큼은 나 혼자여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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