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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Sep 05. 2022

서른셋, 남편이 교수가 되었다

"나 됐대."

남편의 전화였다. 드디어 됐구나, 가슴을 쓸어내리자마자 생각이 스쳤다. 

'어떡하지? 내가 더 잘되고 싶은데.' 

나는 남편의 합격을 질투하고 있었다. 






우리는 스물둘, 스물하나에 만났다. 둘 다 재수생이었고 남편은 대학교 1학년, 나는 2학년이었다. 연애를 시작한 우리에겐 군대라는 큰 산이 남아 있었다. 

"미안한데, 기다린다고 장담은 못 하겠어." 

기다리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2년이라는 시간을 장담하긴 힘들다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내 고백을 듣고, 그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대학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가면 산업체나 연구소에서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변치 않겠다는 다짐처럼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학원에 갔고, 석사와 박사학위를 땄다.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군 복무를 했고, 회사원처럼 출퇴근을 했기에 연애의 공백은 없었다. 



군 복무 후, 결혼준비를 시작했다. 10년의 연애기간 동안 우리를 지켜봐 온 그의 동생은 내게 물었다. 

"언니, 미래가 불투명한 남자랑 어떻게 결혼을 해요?" 

"미래는 원래 불투명한 거니까요"라고 대답할까 생각하다가 웃어버렸다. 그건 거짓말이니까. 나는 마음 깊이 그가 잘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믿은 만큼 잘되지 않았다. 시간강사로 일하면서 수원, 광주, 대구, 부산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면접을 봤지만, 탈락 소식만 들려왔다. 



나는 그의 모의면접관이었다. 면접 날짜가 잡히면 예상질문지를 뽑아 거실에서 랜덤으로 질문을 했다. 거실 TV에 발표자료를 띄워놓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발표를 듣기도 했다. 

'뭐 하나 잘못된 게 없었는데... 왜 자꾸 떨어질까.' 

모의면접관으로서의 역량을 탓할 때쯤, 합격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그것도 대학병원이 있는 서울의 대학이었다. 



우리집 냉장고 화이트보드에는 그달의 하고 싶은 일을 적는 칸이 있다. 일본어 공부, 운전면허, 에어로빅...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매주, 매일 바뀌었지만 그의 칸에는 1년 넘게 두 글자만 적혀 있었다. 

교수

교수가 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던 그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집에 돌아온 그는 전화를 돌리느라 정신 없었다. 시부모님과 우리 부모님, 대학원 선배들, 지도교수님, 대학교 동창들에게 차례로 전화해 축하를 받았다. 모두가 진심을 담아 축하해주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가장 축하해줘야 마땅할 아내인 나는 불안했다. 남편보다 더 성공하고 싶은데, 퇴사 후 프리랜서(반백수)가 된 입장에서 그보다 잘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 사실 너보다 잘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가 교수가 된 지 6개월 후에 저녁을 먹다가 속마음을 내보이자, 그는 큭큭대며 웃었다. 

"너답다, 정말." 

웃음의 이유였다. 정말로 내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성공한 부인 덕을 보고 싶다는 소망도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 나는 성공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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