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학점이시네요."
면접관이 말했다.
대학교에서 나는 '미래가 촉망되는' 학생이었다.
졸업 후 7년 동안 5개의 회사를 거치면서 알게 된 건, 높은 학점은 면접 단골멘트를 하나 늘리는 것 외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슬픈 진실이었다.
하기 싫은 걸 하면 몸이 아프다. 이제 그만 철이 들 나이가 됐는데도 여전히 그렇다. 학생 때부터 나를 봐온 남편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이 시들시들 말라간다고 한다.
국문과를 택한 건 국어를 좋아해서였다. 연극을 좋아하던 친구는 연극을 전공한다고 하자 부모님이 "취미로 하렴"이라며 말렸다는데, 국문과에 가고 싶다던 내게 우리 부모님은 흔쾌히 "좋아하는 걸 하렴!"이라고 오케이 사인을 줬다. 나중에 물어봤더니 20년 동안 휴일없이 장사를 했기에, 자식만큼은 되도록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게 하고 싶었단다.
그.래.도.된.다
대학시절을 다섯 글자로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소설창작 수업에 야한 소설을 써 가도, "시인은 왜 사과를 반만 먹고 반은 남길까요?"라는 시험문제에 "사과잼을 만들고 싶어서"로 시작되는 답안을 써도 괜찮았다. 그림이 궁금하면 그림을 배우고, 클래식이 궁금하면 클래식을 배워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시절, 나는 '교양수업 부자'였다. 국문과이긴 했지만 철학수업도, 의류학 수업도, 미술사 수업도 닥치는대로 들었다. 문제는 단 하나, 꿈이 없었다는 것.
"우울의 원인은 상실입니다."
얼마 전, 마음이 끌려 클릭한 책의 광고문구였다. 나는 뭘 잃어버렸기에 매일 이렇게 우울한 걸까. 그건 얼굴이었다. 빛나던 얼굴. 나는 정말 특별해, 라고 말하는 듯했던 대학시절의 얼굴.
나는 특별하다는 20대의 동화가 깨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단, 취업이 되지 않았다. 처음은 누구나 알 만한 회사, 그 다음은 누구 하나는 알 만한 회사, 마지막에는 아무도 모를 것 같은 회사에 이력서를 냈지만 아무도 나를 뽑아주지 않았다. 뭐 하나라도 마무리짓고 싶은 마음에, 무턱대고 졸업을 했다. 생각지도 못한 최우수 졸업장을 받고 좋아해야 했지만, 기쁘지 않았다. 나의 어리고 특별한 시절은 끝이 났으므로.
1년 반의 백수생활 끝에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곳은 출판사였다. 이후로는 '회전문의 나날'이 이어졌다. 회전문을 밀고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람처럼,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다. 이제 적응할 만하면 퇴사 통보를 하는 식이었다. 여러 차례 회사를 들락거리면서 하는 일도 계속 바뀌었다. 유아 스티커북을 만들다가 학습지를 만들다가 자기계발서를 만들다가 인터뷰를 하고 강연을 기획했다. 일이 바뀌는 와중에 꾸준한 건 딱 하나였다. 회사 화장실 비누처럼 매일 꾸준히 줄어드는 자존감.
다섯 번째 회사를 나오고 나서는 다음 회사를 알아보는 게 지긋지긋해졌다. 그러던 찰나, 내가 집에서 노는 걸 알고 있던 지인들에게서 일이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그냥 백수'가 아닌 '반백수'가 되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반백수'가 아니라 '거의 백수'에 가깝지만. '이제 그만 백수생활 청산하고 취직해야지!' 마음 먹으면 신기하게 새로운 일이 생기곤 했다. 그래서 2년째 프리랜서로 살고 있다. 그 덕분에 이 글의 제목은 《남편은 교수, 나는 백수》가 아니라, 《남편은 교수, 나는 반백수》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