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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미 Jun 26. 2023

여전히 나는

25살 때부터 노트북에 일기를 꼬박꼬박 썼다. 

지금은 벌써 서른 셋이 되었으니, 8년 동안 쓰고있는 셈이다. 


내가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것은, 책에서 어느 한 글귀를 보았기 때문이다. 


"우울하면, 글을 쓰세요. 

무엇때문에 슬픈지, 화가는지, 감정을 침착하게 써보세요.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됩니다"


내 20대는 우울과 슬픔의 나날들로 보냈었다. 그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서 창작을 시작 할 수 있었던 것도 있겠지만, 내 감정은 늘 바닥이었다. 하루 빨리 빠져나오고 싶어서 여러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다 해당 말이 가장 내 마음에 와 닿아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왜 우울한가, 그리고 왜 슬픈가. 지금 나는 왜 이런 감정에 놓여져(버려져)있는가?"


이유가 없는 슬픔도 있었지만, 대부분 사소하더라도 이유가 있긴 있었다. 내가 겪은 일들, 그리고 내가 불안해하는 것들, 내가 상처받았던 말들을 두서없이 적기 시작했다. 손으로 쓰는 것보다는 타이핑해서 쓰는 편이 내게 더 편했다. 누구 보여줄 것도 아니라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과 문장으로 뒤죽박죽 적어댔다. 나중에는 내가 뭘 원하는 지, 희망하는 지, 바람이나 소망같은 것들도 작게 적어놓곤 했다(나중에 그것이 이루어졌을 땐 너무나 신기했다). 


일기를 매일 쓰지는 않았다. 


슬픔이 가득 차 올라서 정말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노트북을 펼쳤다. 어느날은 행복한 순간들도 간혹 적었다. 하지만 대부분 행복한 날의 뒤에는 우울한 날이 (반드시)찾아왔다. 꼬박 꼬박 쓴 일기는 아니라서, 듬성 듬성 날짜와 연도가 적혀져 있지만, 지금은 꽤나 파일의 무게가 두툼해졌다. 


9개월의 공백


오늘 펭귄과 모처럼 쉬는 날이라, 카페에 가서 각자 사색을 즐겼다. 

간만에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들고와서 일기장을 열었는데 꽤나 충격을 받았다. 작년 9월 이후로, 일기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약 9개월 동안, 일기장은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했지만서도 그동안 나는 평일과 주말 내내 너무나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읽기나, 브런치에 글쓰기 조차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유는 새 브런치북을 통해 공개하겠다)

하루를 꽉차게 보냈기 때문이었을까, 도무지 슬플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일기장에 내가 더이상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이 뜻은, 나는 9개월 동안 우울한 적이 거의 없었음을 뜻한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삶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는 왜 더이상 우울하지 않고 슬프지 않은가? 


여전히 나는


오늘은 하루종일 회색구름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가 내리는 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펭귄과 함께 창밖을 보며 차를 마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펼치고,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나는 슬퍼야만 글을 썼던 사람인데, 더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된 것은 과연 결과적으로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 썼다(그래도 좋은거라고 하자)


이 브런치도 내가 가장 우울했을 때 시작했었다. 2017년, 아직도 생생하다. 26살에 영화학교에 다시 편입하고, 우당탕탕 영화를 찍으면서 생긴 여러 감정들을 어딘가에 쏟아내고 싶었다. 운이 좋게도 나의 글이 주목도 받았고, 그 덕에 구독자도 많이 늘었는데, 결국 내가 글을 쓸 명분을 찾지 못해(?) 몇 개월 방치되고 말았다. 꾸준히 글을 쓰지 못하는 유령 작가(?)인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구독을 유지해주고 계신 분들에게 참 감사한 마음 뿐이다. 


아마 이 글도 누군가 읽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글을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오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가 내리는 날이고, 따뜻한 차가 참 맛있었고, 지금도 나는 매우 편안한 상태에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여전히 나는 무언가를 쓰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다. 


나는 이렇게 나의 우울한 일기장과 함께 늙어간다. 과거의 우울한 '나'를 껴안고 살아간다. 지금은 바쁘게,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래도 말랑 말랑하고 감성 가득한 낭만은 남아있었으면 한다. 그래야 계속 무언가를 쓰러 또 올 것 같기 때문에.  

 

(*펭귄은 나의 예비남편이다)



yeoulhan@gmail.com

글/사진 여미


펭귄에게 물었다.

"365일 이렇게 비 내리는 나라로 이민갈래? 너무 너무 행복할 것 같아!"

펭귄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흔들며 껴안아준다.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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