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비슷한 또래이거나, 한 두 살 많아 보였다.
ㅡ 겉옷을 살짝 위로 올려주세요
반드시 좋아질 거라고 당당하게 외치던 돌팔이 의사는 온데간데없고 이제 갓 졸업한 어떤 대학생으로 보이는 도우미가 나의 치료를 돕고 있었다. 초음파를 할 때 쓰는 젤 같은 걸 묻히고 내 배를 살살 문질렀다. 원인 모를 복통과 소화불량을 치료하겠다며 수십만 원을 주고 침실에 누웠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것 같아 보이는 앳된 도우미를 보고, 이 치료에 대한 신뢰도는 급격하게 떨어졌고, 주걱 같은 걸로 배를 문지르는 것 정도야 우리 엄마도, 내 친구도, 아니 심지어 나 스스로도 할 수 있는 일 같았다. 이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하나, 효과가 있긴 한 걸까, 도대체 이 주걱에는 무슨 마법이 나오는 걸까, 불안함과 의구심이 들었지만 도망치지 못했다. 정적이 흘렀다. 두 눈을 꼭 감고 괜히 잠든 척했다. 이미 돈은 지불했고, 나는 매주 이곳에 와야 한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건물에는 한약 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한약은 지어먹진 않았지만, 꽤나 한약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역에서 내려서 건물로 향하는 길목에도 한약 냄새가 너무 강해서 그런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병원 이름도, 위치도 전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맡았던 한약 냄새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고약했다.
초겨울이었고, 바람은 차가웠고, 지독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옷통을 위로 올리고 병실에 누워있었다. 내 배를 문지르고 있는 이 청년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말 이 치료에 대해서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흠, 이 자식 또 속아서 왔군' 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을까. 최저시급을 받고 늘 기계처럼 같은 일만 반복하는 시간제 근로자일까. 매번 갈 때마다, 이 병원이 풍기는 이상한 분위기에, 고약한 한약냄새에, 아무 생각 없이 인간의 배 위에 맷돌질을 하는 젊은 도우미를 보며, 쎄한 기분을 느껴서 '이건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을 수십 번 들었지만, 어느새 눈을 뜨면 난 이곳에 와 있었다. 멍청이다. 스스로 아무 판단할 수 없는 스무 살의 겨울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별 효과도 없는, 비싼 장난감 놀이를 하고 나서 깜깜한 밤이 되어 집으로 향하는 길. 밀려오는 현타에 음산한 거리를 가로질러 가면서, 내 머릿속에는 앞날에 대한 불안함과, 나약한 영혼들이 가득했다. 아무것도 치유될 수 없는 병을 치료하겠다며, 겉모습만 화려한 그 곳에서 쓸모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어김없이 한약 냄새를 맡으러 오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감과 분노와 울적함에 미치도록 괴로웠다.
한약방냄새와 김동률노래와 커피
작은 가게였다. 어두컴컴한 거리에 아주 작은 가게. 검은색 인테리어에 작은 불빛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사장님 혼자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곳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흰나비를 따라가듯 무언가에 홀리듯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에는 김동률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 곡도, 그다음 곡도 김동률 음악으로 가득 찼다. 사장님은 김동률의 오랜 팬일까, 거의 전곡이 반복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따뜻한 라테를 한 잔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김동률 목소리와, 겨울의 차가운 바람과, 따뜻한 커피는 이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하루 종일 주변에서 흐르고 있었던 불쾌한 감정들, 불안한 미래 같은 것들이, 내 안의 모든 결핍들이, 아주 보잘것없는 먼지들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왜 위로받았을까. 무엇으로부터 따뜻함을 느꼈을까?
그로부터 정말 오랜 세월이 지났다. 나는 그 카페의 이름도, 위치도, 모든 것을 잊고 살았지만, 어딘가에서 우연히 한약 냄새를 맡을 때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그때의 그 카페에 앉아 김동률 노래를 듣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김동률 노래가 흐르고 있었던 그 카페 덕분에, 한약 냄새는 더 이상 나쁜 기억이 아닌, 불안한 마음이 순식간에 평온함을 되찾았던, 나만의 보물 같은 추억이 되었다.
글 여미
커버사진 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