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커피 마실 때만큼은 어른 같아.
"조금 쉬었다 갈까요?"
답변을 마치자 작가는 남은 질문지들을 주르륵 넘기며 말했다. 아직 분량이 많이 남았나.
"아니에요. 바쁘실 텐데 얼른 하고 가셔야죠. 저는 상관없으니깐 작가님이 괜찮으시면 진행해주세요."
"그럼 그럴까요? 죄송해요. 아무래도 매주 진행되는 방송이다 보니깐 조금 빡빡해서요. 감독님들 괜찮으시죠?"
카메라 뒤에 서 있는 촬영 감독님들 표정이 어떤 지는 잘 몰랐지만 아마 멍하게 계시지 않았을까. 이미 한참이 지난 인터뷰. 조금 루즈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다음 질문 한 번 드려볼게요. 작가님께서 쓰신 이번 글의 주시점이... 네, 어린아이의 시점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지 독자분들께서 읽고 난 후에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들이 뭐냐면, 그때의 순수함이 그립다, 마음보다 계산이 앞서는 내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이런 내용들이 많았거든요. 작가님께서 주인공을 어린아이로 설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글쎄요... 이미 작가님과 독자분들이 말씀해주신 대로 어린아이의 시각이 가장 순수하다는 생각을 했죠. 막연한 순수라기보다 뭐랄까요... 바라보는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말하는 거죠. 저 사람이 목마르다 하면 '목마르겠다' 하고 물을 줄 수 있는 마음, 화를 내면 미안하다고 먼저 말하는 마음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왜 나한테 물을 달라고 하지?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지? 같은 마음보다 그렇게 순수하게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어린아이의 마음이라고 생각했어요."
거짓말은 아니긴 한데...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먹고 설정해서 쓴 글은 또 아니었다. 쓰고 나서 보니 설정이 꽤 괜찮게 맞아떨어졌을 뿐이었지...,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하, 그래서 그런 지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같이 쉽게 읽히면서도 잔잔~하게 여운이 남더라고요. 어른 동화...?라는 말이 어울려요. 하하. 이 쯤되면 작가님의 어린 시절도 궁금해지는데요...
촬영이 끝난 후 바로 반대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딱히 할 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혼자 조용히 아이스커피 한 잔이면 될 듯싶어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주문한 커피를 들고 창가에 앉아 인터뷰 촬영 장소를 멍하니 바라봤다. 촬영팀이 분주하게 철수하고 있었고 인터뷰를 진행하던 작가(보조 작가라 그랬나)는 자리에 서서 다른 작가들과 함께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 스케줄을 얘기하는 걸까, 오늘 내 인터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잘해본다고 했는데 좋게 봐주셨을지 모르겠네. 잘 담겨야 할 텐데. 시끄러운 TV를 음소거한 느낌... 방금 전까지 내가 저기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니. 방송 촬영은 처음인데 어떻게 담겼을지 모르겠네.
"작가님의 어린 시절도 궁금해지는데요. 작가님이 글에서 쓰신 어린아이와 작가님의 어린 시절과 많이 맞닿아 있나요? 작가님은 어떠셨어요?"
내가 뭐라고 답했더라. 내 어린 시절...? 음... 언제가 내 어린 시절이지. 유치원 가방 메고 엄마 따라 유치원 다닐 때? 몰래 학원 빼고 PC방 가던 때? 아님 5평짜리 단칸방에서 자취할 때? 언제가 내 어린 시절이더라.
사실 '이제부터 나는 어른이야'라고 생각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나도 놀랄 정도로 모든 것에 미숙했다. 자신감을 가질 때쯤 부딪히는 높고 단단한 벽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가족과 친구들의 응원은 위로가 되어 돌아왔지만, 그때마다 나를 위로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그걸 고통스럽게 버텨낸 내 시간뿐이었다.
오히려 벽이 있을 땐 다행이었지. 벽에 부딪히지 않으면 무엇을 넘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초조한 상태의 연속이었고, 그 느낌은 흡사 길 잃은 어린아이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안과 초조함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내 마음 뒤에 긴 그림자로 남아있다.
"하하, 제 어린 시절이요? 글쎄요. 그냥 꿈 많았던 아이였던 것 같아요. 제 입으로 순수... 라기엔 조금 민망하고, 아니 사실 그때는 순수했죠. 누구나 순수하고 꿈 많았던 시절이 있잖아요."
츠르르릅. 얼음만 남았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거나, 혹은 반대로 멍을 때리고 난 후 정신을 차리면 꼭 입에 뭔가를 물고 있다. 물이든, 커피든, 사탕이든, 젤리든. 군것질거리들은 짧고 긴 생각들의 연결고리 같은 역할을 하곤 한다.
커피를 마시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생각나는 대로 어린 시절들을 돌아봤다. 왜 그렇게 감정적이었을까. 그걸 꼭 표현해야만 했을까? 왜 미지근한 시간들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 뜨거웠고 차가워야만 했을까. 그게 그렇게까지 아파할 일이었나...
어렸을 적엔 입에도 대지 않는 커피를 마시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혼자 여행하고 있다 보니 조금은 어른이 된 듯하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오히려 그때의 불안과 초조,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감정들에 감사하게 된다. 그때 찢어지고 아문 것들로 인해 새롭게 닥쳐오는 감정들을 잠시 앞에 놓아두고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는, 그런 여유를 조금은 갖게 됐다. 물론 아직도 감당하기 벅차지만.
촬영팀 차량이 붕 떠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거리가 한적해졌다. 북적했던 카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일상의 모습을 찾았다.
쓴 글이 화제가 될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만둘까 생각할 때쯤 이렇게 찾아오는 희망이 야속하기도 했다. 진작에 오면 좀 좋아. 글을 계속 쓰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이렇게 재미없는 인터뷰를 찍어서 뭘 하나 싶지만, 내심 한 편으로는 기대가 되기도 한다. 불안과 평안, 기대와 좌절의 연속되는 불협화음에 넌더리가 나지만 가끔 이렇게 여유가 있을 때는 이런 삶이 재밌다는 생각도 든다.
"저는 아직도 제가 어리다고 생각해요. 생각해보면 그때랑 지금이랑 전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어른이라는 게 상대적인 거잖아요. 그냥 조금 지나면 지난 어제보다는 어른인 거예요. 근데 이걸 거꾸로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는 어린아이라는 거죠. 지금이니깐요. 어린아이라고 순수하고, 어른이니깐 이성적이게 되고... 그거는 단순히 나이에 달린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시점에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달린 거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함께 소통해요.
@글쓰는 차감성 (https://www.instagram.com/cha_gamsung_/)
우리의 감성을 나눠요.
@예술 살롱, 감성와이파이 대표 (https://gamsungwifi.com/)
한국영화를 소개해요.
@한국영화박물관 도슨트 (https://www.koreafilm.or.kr/museum/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