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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감성 Mar 20. 2022

연애하는 방법을 까먹었다.

썸타는 방법은 말할 것도 없고

제주도에서 번호를 따였다. 

이런 일에 담담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내 인생에 이런 경험은 몇 안 되는 '사건'으로 여행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난 지금도 설레는 마음을 가질 정도다. 번호를 물어봐도 받기 어려운 시대, 여성 분(심지어 매력적이기까지!)에게 먼저 요청을 받으니 기분이 좋다 못해 얼떨떨했다.


3년 정도의 긴 연애를 마치고 솔로 생활을 보낸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사계절을 두세 번이나 함께 보낸 연인을 잊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녀와 맞닿은 장소에 갈 때마다 불현듯 생각나는 잔잔한 추억들에 여러 번 여운에 잠기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고, 같은 추억이 떠올라도 이전과 다르게 지금은 기분 좋은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흘러가던 회사일도 마무리되고 천천히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야 '솔로'다운 외로움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혼자 떠나는 여행은 여유와 외로움이 공존하는 여행.

5박 6일의 제주도 여행은 회사일로 인한 피로를 덜고, 잡다하게 쌓여있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었지만 따뜻한 제주의 바닷바람은 잠재된 외로움까지 드러나게 만들었다. 애써 외면한 외로움(사실 그 외로움은 인간관계 전반에서 비롯된 감정이지만)과 직면해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번호를 따였다? 웬걸, 얼마나 마음이 꽁기꽁기해지는 일인가.


여행 중간중간,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이후에도 여성분(이하 J)과의 연락을 계속했다. 놀랍게도 J는 나와 멀지 않은 지역에 살고 있었고 연락 초반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양한 관심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J는 말을 아끼는 나와 다르게 활발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타입이었고, 나는 나와 다른 J의 적극적인 매력에 호감을 느꼈다. J 역시 나를 처음 본 순간 그 첫인상이 잊히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고 했으며(그래서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사이비의 포교활동은 아닌가 진심으로 고민했다) 나중에 후회할까봐 번호를 물어봤다고 했다.


영화 '500일의 썸머'


나는 서로가 이 정도의 호감이 있고 여건이 잘 맞는다면 당연히 좋은 만남을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대화 소재가 고갈되어감을 느꼈다. 거기에 J의 이상형은 톡에서도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는, 흔히 말하는 '티키타카'가 잘 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난 이후부터 알게 모르게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라는 부담감이 들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서로의 접점을 찾으려고 하면, 이렇게 반대의 취향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달랐고. 매력으로 느꼈던 '다른 모습'은 서로에 대한 답답함으로 변해갔다.


도대체 연애할 때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한 거지?


말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내 의견이 있으면 잘 풀어서 설명할 수 있고, 처음 만난 사람과도 충분한 스몰 토크를 나눌 수 있을 정도. 특별히 말을 잘하진 않지만 못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그게 연애라는 영역으로 오랜만에 넘어오니(들어가지도 않았지만) 얘기가 달라졌다. 이전 연애 때는 연애 전, 그리고 흔히 말하는 '썸'의 기간이 있어 함께한 경험, 그리고 그 경험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호감'을 쌓았다. 하지만 지금은 함께한 경험은 생략된 채 '호감'이 전제되어 버리니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심리적 장벽이 생기고 말았다. 



서로가 함께 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그리워졌다. 말이 없어도 서로가 무얼 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기분인지 짐작할 수 있는 관계가 생각났다. 그 단계까지 가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 할까? 이야기하지 않아도 서로의 이야기를 가득 담고 돌아올 수 있는 관계가 되려면 그전까지 얼마나 많은 장벽을 넘어야 할까.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J도 번호를 땄을 때와의 마음과 많이 달라져 있는 듯했다. 여행 감성이 올라와있던 나와 서울에서의 나는 많이 달랐겠지. J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J가 느낀 첫인상과 달랐던 '나'를 탓할 생각도 없다. 길게 이야기를 풀어썼지만, '번호를 교환했는데 잘 안 맞아서 쫑냈어'라는 다소 건조한 한 줄로 정리할 수도 있겠다. 꼭 번호를 교환했다고 사귀어야 하는 건 아니니깐. 앞서 J가 이야기한 것처럼 놓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확인하고 아쉬워하는 게 백번 낫다는 생각이다. 결국 그런 작은 일부터 긴 인연이 시작되는 거니깐. J... 역시 멋있어.


문제는 앞으로의 나. 회사-집만을 왔다갔다 하는 나로서는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 호감을 쌓고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하는지. J와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이었을까? 그러기를 바라는 수밖에. 썸은 어떻게 타고, 연애는 어떻게 시작하는지... 앞서 이야기했던 말없어도 편한 관계를 처음부터 기대하는 건 내 욕심일까? 잘 모르겠다.  



J에게는 이런 솔직한 마음을 전해야겠다. 좋은 마음으로 서로를 알아갔지만, 생각과 다를 수도 있음을. 아마 먼저 번호를 물어본 입장이라 미안한 마음에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웠겠지. 연애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묘하게 이별하는 기분이 들어 무언가 억울하지만, 어영부영하게 관계를 지속하는 건 나나 J에게나 좋을 것 같지 않다. 


그나저나 나, 앞으론 연애 어떻게 해야 하나.



@글쓰는 차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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