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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May 01. 2017

사랑의 해체 完

왜 우리는 사랑에 실패하는 가 2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만일 모든 인류가 보편적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사랑을 한다면 우리는 왜 하필 그 상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존재의 유한성을 완전하게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기에, 존재론적 불안을 존재의 불안으로 치환한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기 존재를 이 세계에 수용가능한 형태로 전환시킬 수 있는 가', 즉, 어떻게 하면 이 세계가 자궁 속 세계처럼 나를 인정하고, 그럼으로써 자아 주관 내에서 이 세계가 수용가능한 형태로 나에게 드러나는 지를 파악할 수 있는 가, 와 같은 현상학적 삶의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은 고유한 존재의 터 위에서 발현되는 정신적 결핍과 교묘한 형태로 놓여있다. 인류가 공유하는 존재론적 불안 그 자체가 개인의 정신적 결핍이 될 수 있는 동시에 그 존재론적 불안 위에서 각자의 고유한 정신적 결핍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영생을 살 수 있다면, 그 어떤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지금처럼 중요해보일까? 만일 우리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를 나는 용서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과연 미움, 사랑, 용서 등의 감정은 그전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매 순간 존재론적 불안을 직면하는 것을 미루는 동시에 우리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이 인간의 모든 정신적 결핍을 직면하는 것을 미루게 하고, 종국에 존재론적 불안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굴레를 낳는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나됨'을 막는 고유하고, 보편적인, 두 가지 갈래의 정신적 결핍을 해소할 수 있기를, 그러므로 존재론적 유한성을 인정할 수 있기를 우리는 갈망한다. -이 때, '나됨'이란 단순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함'을 넘어서, 어떤 종류의 사건을 겪지 않았으면 존재하고 있었을 지 모르는, 오직 어린 시절의 선천적인 형태를 간직한 채 존재하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이상이자 고향으로서의 '나임'을 담보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하필'의 문제를 해결하는 고유의 개인적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을 인간은 요구하게 된다.


 인간이 존재론적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오로지 모든 인류가 동일한 결말을 맞게된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도 개인의 삶을 지속시키는 데 있다. 그같은 초라하고, 극적인 결말이 우리의 삶에 찾아온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도, 삶의 유한성을 인정한 후에도 삶을 지속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고, 그같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를 우리는 '사랑한다'. 모든 호르몬의 장난이 사그라든 이후에도 우리가 대상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존재가 나로 하여금 존재론적 불안을 비롯한 정신적 결핍을 직면하게 하고, 그것을 스스로 해소할 수 있도록 존재 자체로서 돕기 때문이다. 자아 주관 내 존재하는 내부적 결핍을 외부의 대상은 영영 해소할 수 없다. 그조차 정신적 결핍을 안은 죽을 운명의 존재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때는 반드시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속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이를 우리는 '사랑'의 형태로 인정하게 된다. 결코 홀로서는 할 수 없었을 기적과도 같은 경험, 삶의 유한성을 인정한 후에도 삶을 포용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고, 정신적 결핍을 직면한 후에도 나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만을 통해서 가능하다. 만일 '사랑'이 없이 이같은 삶의 방식을 취하는 것을 가능한 이가 있다면, 인류는 그를 '성인聖人', 혹은 '괴물'이라 부른다.




 

 앞서 논증했듯, 이 세계에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을 완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부터 그런 대상이 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아주 사소하고, 거대한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이점을 갖고 있는 데, 오직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만 자기의 정신적 결핍을 직면하게 되고, 존재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설령 그같은 존재의 불안이 완전하게 해소될 수 없을 지언정 그같은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 -현시적으로, 그리고 초월적으로- 은 인간의 삶으로 하여금 그렇지 않은 인간과의 거대한 차이를 만든다. 오직 사랑하는 대상을 통해서 인간은 이 세계의 일부로서 연결되게 된다. 굳이 그 사랑이 응답받을 필요는 없다. 사랑을 하는 순간, 더 이상 그는 이 세계와 단절된 채 부유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존재의 이후에 흔적을 남기는 형태로 삶을 이어갈 수 없고, 존재의 목적 자체를 잊은 채 하루하루를 생존하는 데 초점을 맞춘 채 살아가는 이들과 진정한 사랑을 하는 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대단한 차이를 갖게 되는 데, 사랑을 하는 이에겐 존재의 목적과 원인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자아를 인정받는 것을 통해서 자기 존재가 이 세계에 영원히 타인이 아님을 확인한다. 나를 사랑하는 상대는 나의 존재를 이 세계에 연결시키고, 타자의 비극을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결국 이같은 현상은 필연적으로 자아 외부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것은 어쩌다 허리케인이 외딴 오두막에 꽂히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확률을 품고 있다. 그 사소하고, 광대한 차이에 관해서 소중함을 느끼는 자만 진정한 사랑에 성공한다. 사랑의 성공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교제도, 결혼도, 출산도 아니다. 자기 존재의 결핍을 직면하면서 아이러니하게 그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순간, 인간은 성공적인 사랑을 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랑이란 현상에 성공과 실패라는 판단을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과연 '사랑함'은 '큼' 혹은 '작음' 등의 형용사처럼 그 보편적인 의미와 지칭 근거는 모든 인류가 공유할 지언정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에 의거해서 양상의 정의가 판단되는, 즉, 전적으로 주관에 의해서 매 순간 판단 근거와 결론의 不와 正이 갈리는 일일까. 누군가 '사랑한다'는 것을 발언할 때, 타자가 그에 대고 '아니야' 라고 할 수 있는 종류의 경험이 그것은 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언어론적 이해에 대해서 깊숙하게 살펴볼 수 없겠지만, '사랑한다'는 '크다'와 '작다'와 달리, 동사의 형태로서 씌인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걷다'가 무엇을 지칭하는 지 분명한 것처럼, -그것은 '달리다'도, '뜀박질하다'도 아닐 것이므로- '사랑한다'가 무엇을 지칭하는 지 분명하다 -그것은 '집착하다'도, '비이성적으로 군다'도 아니기에.- 단, 그것은 어떤 종류의 행동을 통해서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에, 즉, 타자의 비판적 시각을 통해서 판단될 수 없는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그것의 유무有無를 판단하기 위해서 보다 깊숙한 형태의 자기 반성이 개인에게 요구된다.


 수많은 예술 작품이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바로 그같은 사랑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갖는 자기 반성이 부재한 상태에서 -심지어 사랑에 대한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호감, 육체적 끌림, 교제 등을 '사랑한다'는 것과 오도하는 역사적인 실수를 바로 잡으려는 인류의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사랑은 보편적인 지칭 대상이 될 수 있는 감정을 갖지만, 그 과정의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담보하는 특질상 주관적 판단 대상이다. 만일 두 사람이 사랑을 하고 있는 지, 아닌 지, 는 과연 대상이 나의 존재론적 불안을 비롯한 정신적 결핍을 영원히 해소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같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가, 를 타자가 파악할 수 없다는 가정 하에 외부에서 판단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보편적인 의미로서 이해를 당할 수 있을 지언정, '사랑한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모든 타자의 파악을 거부하는 주관적 현상이다. 누군가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통해서 자기 존재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요소를 발견했고, 하필 두 사람이 존재 불안의 완전한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도 서로의 존재를 절실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동일한 바를 지칭하는 다른 감정과 전혀 다를 바 없지만, 특별하기 그지없는 한 가지의 사랑이 피어난다. 그러나 하필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러한 보편적인 과정으로 파악할 수 없는 그 의미 내에 함축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큼'과 '작음'처럼 타자에게 논의의 여지를 제공하지 않으며, 영원히 타자가 파악할 수 없는 영역으로 숨게 된다.


  당연히, 인간 본연의 고독을 직면하게 하는 가장 초월적인 경험인 '사랑'을 호르몬의 장난으로 격하시킨 과학이나 과연 그같은 '사랑의 기술'을 어떻게 터득해야 하는 지에 대한 방법도 제대로 제시하지 않은 채 모든 개인의 생존을 위한 노력을 자본주의의 지배 하에 나태하게 적응하는 보편적 현상으로 취급한 남성 철학자의 자만에 대해선, 사랑에 대한 그같은 단순한 차원의 본질의 오도가 얼마나 많은 시대의 개인의 삶을 비극으로 이끌었을 지 떠올리면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에리히 프롬은 일련의 기술만 익히면 사랑이 어떤 상대와, 어떤 형태로든 가능하다, 는 것처럼 보이게 사랑을 보편적 기준을 통해서 발현될 수 있는 바로, -즉, 타자로 하여금 판단될 수 있는 바로- 오도한다. 그러나 과연 그가 제시한 사랑의 기술이 '누구나' 삶에 적용가능한 것인 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라도, 사랑은 그 보편적 의미 내에 선제적으로 포함된 독립적 조건에 의해서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주관적 현상이다. 언제나 사랑에 관해서 제기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이 가능한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나의 존재론적 불안을 이기게 하는 한 가지의 사랑이 가능한가' 냐는 것뿐이며, 그같은 과정 내 개인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사랑의 정의를 세우고자 하는 모든 논의는 철학자의 자만에 불과하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랑하고 있는 가, 아닌가는 존재 불안을 극복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식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현상이며, 시한부 호르몬의 생성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소멸하고 마는 것도, 일련의 '기술'을 익히면 -여전히 나는 그가 제시한 것을 익힐 수 있는 종류의 '기술'이라고 여기지 않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종류의 이성적인 영역에서 발생가능한 보편적 결론도 아니다. 사랑은 그 형식상 측면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강제한 것을 제외하고, 어떤 종류의 답도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다. 오로지 한 대상을 향한 사랑에 참여하는 개인의 자각만이 그것의 존재를 담보할 수 있다. 한 가지의 사랑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과학자가 체내에서 발견한 호르몬도, 철학자가 정의한 조건적 정의도 아니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가, 아닌 가. 당신의 사랑은 성공인가, 아닌 가. 툭하면 개인을 자본주의의 노예로 전락시키기 좋아하는 부르주아 백인 남성 철학자도,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 없을 것처럼 생겨서 '호르몬'만 연구하는 과학자도 믿지말라. 오직 당신만이 답을 알고 있을 뿐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선택받은 소수의 인류에게 '어쩌다' 찾아오는 우연이 아니다. 오로지 사랑의 의미를 깨달은 자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경험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 모든 환상이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무언가다. 진정한 사랑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영원히 미뤄뒀던 숙제인 존재론적 불안을 포용할 수 있다. 해소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사실, 언젠가 이 삶에 종말이 있으며,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간은 그제야 최소한의 갈등을 안고 인정한다. 진정한 사랑을 할 때의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을 통해서 그러한 불안을 스스로 극복하고자 의욕할 수 있다. 오로지 나로 하여금 그러한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뿐, 절대로 그 존재 자체로 나의 존재의 불안을 극복하게 할 수 없지만, 그 의욕을 갖게 하는 경험은 비록 사소해보일지언정 거대한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알고 있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 세계의 존재 불안을 이기기 위해서 사랑만큼 효율적이고, 유일한 길은 없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랑을 하는 이는 알지 못한다. 심지어 그같은 것을 깨달은 이들조차 존재 불안을 해소할 수 없다는 기가 막힌 운명적 비극에 말을 잃게 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생과정의 시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는 존재의 목적을 달성시키게 해주는 것, 나를 이 세계에 연결시켜주는 존재가 이 대상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이에게만 '사랑'은 허용가능한 영역이 된다. 오직 사랑의 최초 목적을 배신할 지언정, -나의 존재론적 불안을 해소해주길 기대했던 목적- 사랑의 최종 목적을 깨닫게 하는 -나의 존재론적 불안을 스스로 해소할 수 있게 하는- 대상의 소중함을 아는 자만이 사랑이란 현상을 이해하고, 성공할 수 있다. 물론, 영원히 해소될 수 없기에, 존재론적 불안은 정신적 결핍의 깊이만큼 이따금 우리를 덮친다. 막 아침에 눈을 떴을 때처럼, 모든 삶을 향한 노력을 그것은 헛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랑을 한다. 존재의 불안과 필연적으로 맞닿아있는 정신의 고유한 결핍은 더 이상 타자를 통해서 채울 수 있는 공백이 아니라,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무언가며, 내 존재가 끝날 때까지 내가 안고가야 하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러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이 하는 하나의 사랑, 아마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맛의 아이스크림을 먹고, 같은 맛을 두 사람이 경험하는 것과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을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내가 상대에게서 사랑을 발견하는 것과 상대가 나에게 사랑을 발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독립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안다면, 절대로 누구도 그 '나'를 기반으로 갖되, '나'를 배제한 그 일방적인 현상의 통제불가능성을 깨닫는 다면, 누구도 '나를 사랑하는 이'를 그처럼 쉽게 대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일방적이고, 독립적인 감정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상대가 나에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지 탐구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으며, 대개의 경우, 상대가 나에게 사랑에 빠지게 하게끔 하는 모든 노력은 관객이 박수조차 치지 않는 치졸한 연극에 그치가 된다. 사랑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허구다. 사랑의 상호가능성, 나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그가 나로 인해 얕은 수준의 착각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나’ 그 자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일 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영원히 소통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를, 그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어떤 이는 단순히 '사랑한다'는 호르몬의 장난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고, 어떤 장애도 뛰어넘을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그의 주관에 드러난 현상으로서의 내가 無에서 有를 창조한 게 아니라, 나의 본질을 기반으로 생성된 것이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이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서 타자의 주관 내 발현된 현상 속의 자아를 연기하면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관계가 존재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에게 그같은 현상은 허락될 수 있다. 대상의 의식 내 주관에 드러난 현상으로서의 나와 실제로 존재하는 나의 본질을 좁히기 위한 노력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며, 장기간의 관계를 유지할수록 두 사람은 이같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다투는 과정을 겪기도 한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라는 이제 연기는 그만하고 싶다, 는 그 지독한 존재의 본질로부터 뻗어나오는 외침을 상대가 경청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당신을 머릿 속의 인형의 집에 가두고 싶어한다면, 그러므로 그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란 거짓된 허상 속에 당신을 좇는 데 불과했음을 당신이 깨닫게 된다면 그 관계의 결말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애당초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라고 볼 수 없다.


 아마도 이 세상에는 개별적 존재의 생존을 향한 외침을 발언할 필요가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이들, 서로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대사에 관한 개별적 환상을 유지시키려고 노력하면서도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환상을 완전하게 해체하는 것은 '사랑'이란 현상을 유지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거니와, 그같은 해체를 시도하는 것은 차라리 관계에 대한 모독이 될것이므로.- 대상의 결핍을 인정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같이 존재-내-존재-간 갈등의 균형을 쥐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들을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일컫는다.


 우리는 종종 인간을 섬에 비유한다. 이 세계에 단절된 채 부유하는, 그 자신조차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원히 독립적인 존재. 그러나 사랑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섬이 아니다. 누군가와 연결된 그는 유한하고, 무의미하고, 의미없이 발생한 땅덩어리일지언정, 그만큼 유한하고, 무의미하고, 의미없이 발생한 존재인 누군가로부터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얻는 형태로 단단하게 연결돼서 한 번도 연결되지 않았던 이 세계에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존재에게 어떤 종류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었던 시기를 벗어나, 나의 존재로부터 누군가를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준 이를 통해서 자기 존재의 목적과 가치를 발견하고, 우리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 사랑하는 이의 존재를 통해서 우리는 존재론적 불안을 가진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 세계에 연결된 일부로서 자기 자신을 대할 수 있다. 더 이상 그에게 삶은 고독과 혼란, 고뇌가 아니며, 다만 이어나가야 하는 것, 생활의 터로서 발전시켜야 하는 무언가가 된다. 설령 언젠가, 그같은 감정이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도, 다시 섬으로 돌아갈지언정 이 세계로부터 존재의 의미를 얻는 경험을 해본 이와 그렇지 못한 이의 삶의 방식의 차이는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굳이 논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사랑'이란 지나치게 감상적인 단어 뒤에 놓인 진정한 감정은 '고마움'에 가장 비슷할 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우연에 의해서 이 세계에 발생한 존재자로서의 나에게 존재의 목적을 되찾게 하면서, 영원히 이 세계와 단절된 채 타자로서 부유할 줄 알았던 나라는 존재의 목적과 가치를 깨닫게 하고, 비로소 이 세계와 나의 갈등을 화해시키고, 이 세계에 나를 연결시켜줘서 고맙다는 그 지독하리만치 절실했던, 애닳는 마음을 우리는 '사랑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사랑이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어쩌다 던져진 이 세계 속에서 유한하고, 무의미한 존재로서, 그처럼 결핍된 존재자로서 자기 자신을 수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하기 전까지, 엄밀한 의미에서, 충분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 그 대상의 주관 내 현상된 자기 자신과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혹은 직면하면서, 인간은 불충분한 자기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어쩌면, 모든 사랑에 관한 역사적 이야기는 진리의 편린일 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진정한 사랑만이 잠든 공주의 눈을 뜨게할 수 있다는, 그 지루한 해피엔딩 스토리마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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